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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여성'에 실린 백석 시와 정현웅 그림 작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할미디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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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지음/ 다할미디어/ 274쪽/ 1만8천원 |
시는 곧 그림이고, 그림은 곧 시다. 송나라 시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문인이자 화가였던 소식은 예술의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시와 그림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는 시화일률론(詩畵一律論)을 주장했다. 이런 시화일률 또는 시화일치(詩畵一致) 개념은 동양의 중요한 사상이었다.
저자는 "시인과 화가의 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예전에는 그랬다. 시인과 화가의 관계는 형제지간이었다"고 말한다. 1920~30년대의 서울은 문학과 미술이 한 가족이 되어 동고동락했다. 문학과 미술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교유하며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진입, 예술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화가 나혜석과 시인 최승구를 비롯해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 화가 이중섭과 시인 구상, 그리고 시인 김지하와 판화가 오윤에 이르기까지 끈끈한 관계로 유명한 사례는 많고도 많다.
이 책은 우리나라 근대기의 시인과 화가들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26세 청년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곳곳을 배회하며 겪는 일을 묘사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 작품을 보면 당시 서울의 모습과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의 삽화는 박태원의 친구이자 그림도 빼어나게 잘 그렸던 시인 이상이 그렸다. 사실 이상의 꿈은 본래 화가였다. 그가 그린 '1928년 자화상'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할 정도였다. 자신의 소설 '날개'에 삽입된 드로잉도 본인의 솜씨다.
식민지 시절, 역설적이게도 문화예술은 오히려 찬란한 꽃을 피웠다. 젊은 지식·예술인들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함께 20세기 초반 서구의 사상, 철학, 문화 등을 빠르게 흡수하며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설움,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예술적 교감을 나누고 이를 각자의 작품에 반영하면서 '경성의 르네상스'를 일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의 사례를 보자. 백석은 현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뽑을 만큼 인기 시인이다. 북방 정서 혹은 농촌 정서를 시 세계의 바탕에 깔고 '사슴'과 같은 개성적인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백석은 1939년 말 조선일보사 출판부의 '여성' 잡지사를 퇴직하고 만주로 떠났다. 일종의 탈출이었다. 그런 백석이 만주에서 절친했던 친구인 화가 정현웅을 생각하며 시 한 편을 썼다. 바로 문제의 시 '북방(北方)에서-정현웅에게'이다. 백석의 시 가운데 특정인을 거명하면서 쓴 헌시로는 유일한 예다. 백석의 시 세계, 그것도 심각한 시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 사이인 정현웅과 백석의 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살피게 한다. 그만큼 이들은 시인과 화가의 입장에서 예술세계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돈독한 사이였다.
화가 나혜석의 예는 어떤가. 그녀는 일제 강점시대의 여성, 정말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도쿄 유학생 사회에서 나혜석은 빛나는 꽃이었다. 재학 시절 그는 소월(素月) 최승구와 열애를 했다. 그들은 약혼부터 공포하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조혼 제도가 성행했던 당시의 사회 풍습에 따라 남자 유학생들은 대개 기혼자였다. 최승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의 불꽃을 뜨겁게 태웠다. 하지만 최승구는 결핵으로 요절했다. 나혜석에게 발광의 시간을 안긴 사건이었다. 나혜석은 자신의 삶을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살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저자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창작자들이 어떻게 시대를 끌어안고 예술세계를 풍요롭게 가꾸었는지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면서 "문인과 화가의 만남이 과거 이야기로만 묻히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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