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1] "하늘이 내린 장수" 죽음 무릅 쓴 상소로 이순신 목숨 구한 명재상 정탁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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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08   |  발행일 2021-11-08 제12면   |  수정 2021-11-08 10:24
금당곡 외가서 태어나 1558년 급제
도승지·대사성·판서 등 두루 거쳐
임진왜란때 곽재우·사명대사 천거
투옥된 의병장 김덕령 구명 상소도
말년 고향서 전란 후유증 수습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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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동호언덕 위에 위치한 읍호정. 약포 정탁이 벼슬에서 물러나 예천 고향에 내려왔을 때 지은 정자로, 내성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북 예천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명재상 약포 정탁을 비롯해 성리학의 대가 윤상,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인 권문해, 근대 이후 고전문학의 기틀을 닦은 국문학자 조윤제, 고려시대 반란을 진압한 충신 임지한, 구한말 국권수호에 앞장선 장화식, 천년고찰 용문사를 창건한 두운 선사 등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인재들의 고장이 바로 예천이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예천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미래 예천'을 이끌어갈 원동력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예천이 낳은 인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시리즈를 연재한다. 1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구한 명재상 약포 정탁에 대해 다룬다.

#1. 금당실의 군계일학

형형한 눈빛의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대번에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금당실이다!"

오미봉이 눈에 가득 들어오자 청년은 고향에 돌아왔음을 절감했다. 이내 걸음을 재촉해 울창한 솔숲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막 약관의 나이에 이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이었다.

"이제 여기서 높이 날 준비를 하는 게다."

정탁은 예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집안이 예천에 입향하게 된 것은 안동사람이었던 그의 부친 정이충(鄭以忠)이 예천 금당곡 삼구동에 살던 한종걸(韓從傑)의 딸에게 장가들면서다. 이때부터 서원 정씨는 예천에 세거할 기틀을 놓았다. 정탁은 금당곡의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10세까지 생활했다. 명민했던 그는 이름난 스승을 찾아 고작 11세에 안동의 가구촌(佳丘村)으로 넘어가 수학했고, 17세가 되던 해에는 퇴계 이황에게 입문해 학문을 심화했다. 그러는 동안 나라는 중종에서 인종, 다시 명종으로 왕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세월이 벼락같았다. 그 세월을 따라 정탁도 성인이 되었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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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 산기슭에 있는 도정서원. 서원의 사당에는 약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약관의 나이에 다시 예천 고향으로 돌아 온 정탁은 공부에 더 전념했다. 22세가 되던 해에는 평생의 반려도 맞이했다. 고평사람 반충(潘)의 딸이었다. 이로써 예천에 완벽하게 뿌리를 내린 정탁은 1552년(명종7)의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명종13)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정탁의 첫 관직은 교서관의 말단 정자(正字)였다. 이후 예조정랑 등을 지낸 뒤 1568년(선조1)에는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서 도승지, 대사성, 관찰사, 참판, 판서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82년과 1589년에는 각각 진하사(進賀使)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뜻이다.

정탁은 참으로 맑고 바른 인재였다. 주변에서 늘 "고결하기가 마치 들판의 학 같고, 아름다운 광채를 머금은 옥과도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기만 하지도 않았다. 강직한 성정으로도 유명했다. 이를 잘 아는 스승 남명 조식이 어느 날 집으로 정탁을 불렀다. 사제 간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 길에 조식이 정탁을 불러 세웠다.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으니 끌고 가게."

"스승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자네의 민첩함과 날카로움을 보게. 날랜 말과 진배가 없지를 않나. 하나 세상은 둔하고 더딘 소의 기운도 있어야 멀리 갈 수 있는 법이지."

깊은 깨달음을 얻은 정탁은 갈등과 충돌 없이 명분을 바로 세우는 데 진심을 다했다.

#2. 난세의 명재상

1592년 4월13일 경상도 가덕도의 응봉봉수대가 급박하게 움직였다.

"왜선이 출몰했습니다. 대략 90여 척이 부산포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봉수를 올려라! 파발을 띄워라!"

다음 날 부산포는 긴박했다. 상륙한 왜선이 무려 여덟 배에 달하는 7백여 척으로 불어나 있었다. 관군과 백성들은 대경실색했다. 1만7천여 명의 왜군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준비 안 된 전쟁에 파죽지세의 적, 왕부터 피신시켜야 했다. 당시 67세였던 정탁은 우찬성 겸 내의원 부제조로서 선조의 피란길을 호종했다. 계절은 봄이지만 마음은 한겨울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평양성에 도착했지만 전선은 갈수록 악화됐다. 임진강 방어전투가 실패하면서 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침통한 표정의 선조가 명했다

"의주로 옮기겠다."

임금의 뜻에 정탁이 눈물로 호소했다.

"평양을 굳게 지킴으로써 국운의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한양을 놓친 것은 지난일이라 어쩔 수 없으나 이곳마저 버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정탁의 호소에도 선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버리는 것이 아니다. 세자에게 힘을 줄 터이니 분조를 구성해 대응하라."

간결한 명을 내린 선조는 의주로 떠나버렸다. 세자(광해군)를 중심으로 한 분조(分朝·임시파견정부)에는 영의정 최흥원, 형조판서 이헌국, 부제학 심충겸, 형조참판 윤자신, 동지 유자신, 병조참의 정사위, 승지 유희림 그리고 이사(貳師·세자시강원의 관직)의 직을 명받은 정탁이 포함됐다.

정탁은 영위사(迎慰使)로 파병 온 명나라의 관리와 장수를 접대하는 외교관 역할을 맡았다. 이후 세자와 함께 군사들을 모아 훈련 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최선과 전력을 다했다.

그러던 1594년(선조27) 9월 어명이 떨어졌다.

"관직의 유무, 서얼, 공사천(公私賤), 승려, 속인을 막론하고 인재를 천거하라. 내 그들을 들어 쓰리라."

좌찬성이었던 정탁은 곽재우, 홍경신, 승려 유정(사명대사) 등 26명을 천거했다. 실제로 이들은 전란 극복과 국가재건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정탁의 지인지감(知人之鑑), 즉 사람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증명했다.

일촉즉발의 전쟁은 계속됐다. 하지만 당쟁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데 뭉쳐 힘을 모아도 부족한데 날선 대립과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정탁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1596년 2월 충장공(忠將公) 김덕령(金德齡)이 의금부에 투옥됐다.

김덕령은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명장이었다. 가는 곳마다 왜군을 격파해 세자로부터 익호(翼虎·날개달린 호랑이)장군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 첩보가 늦게 전달되는 중대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분노한 김덕령이 죄인을 장살했는데, 그가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였다. 결국 김덕령이 투옥되면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이때 정탁이 나섰다.

"김덕령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난 장수입니다. 나라에 절실한 인물입니다."

명장이 필요한 때임을 강조한 정탁의 상소로 김덕령은 구명될 수 있었다.

그러던 차 이번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체포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의 발발로 72세의 노령임에도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던 정탁은 기함했다. 조신들의 모함과 왜군의 이간책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장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국문을 받고 이미 반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선조 역시 단호했다. 누구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두 처벌을 주장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때 정탁이 상소를 올려 담대히 나섰다. 죽음을 무릅 쓴 상소였다.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정탁의 호소에 류성룡·이원익 등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탁의 상소문이 결국 선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정탁의 구명으로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명량대첩에서 대승하며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직언(直言)이 나라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 자경(自警),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는 삶

"부귀, 이익, 출세는 운명에 달린 것이니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 또한 배우는 자로서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민첩하게 일하며 말은 삼가고, 도(道)가 있는 곳에서 바르게 살 뿐이다."

일흔다섯이 되면서 정탁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치사(致仕)라고 하여 고령이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이 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지키는 이가 드물어 치사하는 인물은 욕심을 버린 깨끗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근세에 재상으로서 치사한 자는 오직 정종영, 심수경, 홍가신, 그리고 정탁뿐이었다"라고 써서 이름을 높였다.

예천 고향에 돌아온 정탁은 내성천이 보이는 고평리에 '망호당(望湖堂)'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짓고 생활했다. 건너편 동호언덕에는 정자 읍호정(湖亭)을 지어 드나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전란의 후유증을 수습하는 데 매진했다. 내성천이 범람할 때마다 물에 잠기는 고평들에 제방을 놓고, 고평동계를 조직해 황폐화된 향촌사회를 재건했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진심을 다한 정탁은 1605년 고향 예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예조좌랑을 파견해 조문하도록 하고, 영전에 제사를 지내는 사제문을 내렸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선조로부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호성(扈聖)공신3등에 봉해졌고, 사후인 1613년(광해군 4)에는 영의정과 위성(衛聖)공신1등에 추증됐다. 1635년(인조 13)에는 정간공(貞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곧을 정(貞)'과 '대쪽 간(簡)'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했다.

"도리를 지키고 벽처럼 우뚝하며 의리로 진퇴하며 역경에는 절개를 지키고 겸허와 공손으로 사람을 대했다. 경세를 바탕으로 명분을 바로잡고 마음가짐은 공정하고 충성스러우며 언론은 올바르고 공평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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