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설거지론

  • 차우미(생명평화아시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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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2 07:48  |  수정 2021-11-22 07:51  |  발행일 2021-11-22 제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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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미〈생명평화아시아이사〉

2016년 개봉한 스위스 영화 '거룩한 분노'는 1970년이 되도록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았던 스위스 한 마을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도 한참 지난 시점까지 스위스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여성의 참정권 투쟁을 다루는 영화 곳곳에는 여성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성적 억압이 드러난다.

1990년 전미여성대회의 슬로건은 '여성도 인간이라고 하는 급진적 사상'이었다. '여성도 인간이라고 하는'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에다 '급진적 사상'이라는 의아한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바로 그때까지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현실을 부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한국 사회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러 지표에서 분명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할 때 여성들을 향한 '백래시' 또한 항상 있었음을 세계의 여성운동사는 보여 준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회자되는 '설거지론'과 '퐁퐁남'이라는 신조어는 여성에 대한 '백래시'의 혐의가 짙다. '설거지론'은 연애 경험이 적으며 스펙이 좋거나 소득이 높은 남성이 20대 시기에 연애를 즐기던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이미 '더러워진 식기'를 설거지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퐁퐁남'은 부인에게 소액의 용돈을 받고 취미생활이 제약돼 결혼생활 자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유부남을 일컫는다고 한다. 여성을 식기에 비유하고, 이기적이며 의존적인 존재로 보는 설거지론과 퐁퐁남 자체가 매우 성차별적이다.

최근 한 지역 신문에 '설거지론과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성'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사설은 설거지론을 언급하면서 여성성을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로 한정하고, 페미니즘이 이 여성성을 죄악시하여 대다수 여성을 불행하게 한다는 논리를 편다. 여성을 단지 아내나 어머니로만 인식할 뿐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그 사설을 보며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던 스위스 작은 마을 여성들의 거룩한 분노가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필요함을 느낀다.

설거지론은 여성을 차별하고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논리지만 그러한 비인간성에 대항하는 '거룩한 분노'는 세상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모든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가치는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겨울이 오는 길목, 가족과 함께 영화 '거룩한 분노'를 한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차우미〈생명평화아시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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