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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현(시인·평론가) |
올해 은퇴를 앞둔 아버지의 수첩에는 한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얼마 전 한자 1급을 따신 후로도 지속적으로 한자를 공부하고 계신 아버지는, 퇴근하시고 나면 수첩에 한자를 모으고 분석하신다. 이 수첩 위에서 이뤄지는 일은, 그러나 우리가 한자 공부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암기가 아니라, 한자로 이뤄진 단어를 구성하는 원리와 요소에 대한 즐거운 연구다. 음절 단위의 분석도 있고 단어의 분석도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단어가 의외로 듣도 보도 못한 낯선 한자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뵐 때마다 가끔씩 그런 말씀을 해주신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손녀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자기 주장을 말할 때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童)란 마을(里) 위에 서 있는(立)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버지께는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의 말하기인 것이다.
누구나 세계와 접속하는 고유한 코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예술이나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금 뿌린 생선을 팔면서, 분필 가루를 날리면서, 긴 대화를 나누면서, 산세베리아를 돌보면서, 케냐AA 커피의 향을 맡으면서 문득 세계의 이면을 마주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대상과 오랜 시간 밀착되어 있을 때 문득 개방되는 감각의 순간이다. 40년이 넘는 시간을 한 회사에서 근무하신 아버지는 조직적으로 짜인 세계 혹은 질서가 생각보다 고유하고 낯선 개인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한자를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회사를 다니며 일본어를 공부해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신 아버지에게, 젊은 시절의 일본어 공부와 지금의 한자 공부는 반복되는 일상의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자, 바깥에서 일상을 살피는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한 개인의 내면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면 낯설고 아름다운 말의 조합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런 말을 살펴 가며 시를 쓸 때 시 쓰기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 내면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태도와 동일하다. 일상에 충실하기. 반복되는 일상에서 충만한 상태로, 조금은 떠 있는 상태로 시를 써나가는, 영화 '패터슨'의 버스기사 패터슨의 수첩과 패터슨의 모티브가 되었던 미국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과 아버지의 한자수첩은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김준현<시인·평론가>
김준현 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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