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34) 김우조] 독학으로 판화 개척…서진달 선생 만나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하고 졸업후 대구경북 돌며 미술교사로 재직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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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13   |  발행일 2022-06-13 제20면   |  수정 2022-06-13 07:37
'현대판화 10년전'에 출품하며 존재 알려…판화 특유 '민중적 가치' 깨닫고 교육보급에도 힘써

김우조

현대사의 가장 거친 시대 속에서 독학으로 판화 장르에 도전한 김우조의 길은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

요즘은 판화가 실용가능한 미술의 한 분야로 인정을 받지만 60여 년 전 선생이 처음 판화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회화에 비해 늘 한 수 아래로 취급됐다. 또 제대로 기법을 배울 만한 스승이나 선배가 없던 시절, 선생은 독학으로 판화를 개척해 냈다.

비싼 물감 값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형편 탓에 선택한 목판화였지만, 그는 판화가 가진 '민중적 가치'를 깨쳤고 판화를 찍는 과정에서 판화가 가진 특유의 미학을 깨달았다. 그는 "판화작업을 하면서 늘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판화의 길에 정신적 지주는 팔만대장경의 불화였다. 또한 조형의 기초를 가르친 서진달 선생이 있었기에 그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장르의 판화작품들을 비롯해 수많은 유작을 남겨두고 2010년 12월31일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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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조 '뒷골목 풍경'(목판화, 1977)

◆계성중 시절 서진달 선생 만나…조선미술전람회 입선 후 교사로 재직

김우조는 1923년 달성군 옥포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손재주가 많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를 만지고 다듬는 일에 익숙했고 그림을 곧잘 그렸다. 화원초 등을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으로 진학해 당시 5년제 중등 과정을 다녔다. 계성중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전문 미술교사가 없다가 계성고 5학년이 되던 해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첫 미술 교사로 부임해 온 서진달 선생을 만나 그에게 배운 내용을 자신의 작업의 기초로 삼고 예술관을 형성했다. 서진달 선생은 1941~42년 계성중 미술 교사로 짧게 재직했다. 이 시기 김우조, 백태호, 추연근, 서복섭(서동진의 아들) 등이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한 해 후배로 김창락, 변종하 등이 있었다. 서진달 선생은 김우조가 친구 추연근을 그린 작품 '책을 읽는 소년'을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하게 했다. 그 경력으로 김우조는 졸업 후인 1943년에 첫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교직 생활을 이어갔다.

첫 부임지는 청도군 송서초등(현 풍각초등)으로 발령을 받았고 재직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이듬해인 1946년 포항중 강사로 전보돼 이후부터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는데 1950~60년대 대부분은 대구의 근무지서 보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일부를 다시 왜관·구미 등 경북 각지를 돌며 교편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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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조 '50년대 회상'

◆판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유화 물감 값이 아까워서

선생이 판화를 시작한 것은 1950년대다. 1959년부터 판화작품을 제작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69년 '한국판화협회' 주최로 '항성화랑'에서 개최된 '현대판화10년전'에 출품하는 등 판화가로서의 존재를 알렸다.

선생은 판화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유화를 그렸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유화물감을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유화 물감값도 아까웠다. 유화는 한 작품밖에 없지만 판화는 여러 작품을 남길 수 있고 보관도 간편했다. 어릴 때부터 칼로 나무 만지는 것을 좋아했기에 나무판에 모양을 새기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지와 먹만으로도 판화를 찍을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색이 필요하면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도 됐다.

그렇지만 당시 어느 누구도 판화를 정식으로 시도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선생은 학교 때 수업 들으면서 익혔던 지식만을 바탕으로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판화기법 관련 서적을 밤새워 읽으면서 판화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조금씩 기술을 익혀나가고 습작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더 강한 확신이 필요했던 차에 청도 풍각초등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동료 교사가 보여준 대장경판을 찍은 불화 한 점을 봤던 기억이 났다.

◆그의 정신적 지주는 팔만대장경의 불화

김우조는 대구의 문화잡지 월간 '대구문화' 2001년 6월호에 기고한 '나의 삶, 나의 예술'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0년대 어느 날, 친구 두 사람과 해인사로 향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던 날, 해인사를 찾은 것은 팔만대장경의 판목을 보기 위해서였다. 판화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스승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팔만대장경이라는 판화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대장경 중에서 그림이 새겨진 판목을 한번 보고 싶었다. 청도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덕에 팔만대장경 판화에 경문을 새긴 것 이외에도 그림을 새긴 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젊은 스님을 설득한 끝에 경각 한 편에 그림만 새겨놓은 판목이 있는 곳으로 나 한 사람만 들어가게 허락을 받았다.

그때 손으로 만져 본 해인사 판목을 보고 선조들의 예술적 안목에 놀랐고 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스승이요, 내가 판화를 계속해 온 이유다.

선생은 이 글에서 "목판화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좋은 재료가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좋은 재료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칠이 좋은 합판을 구해 작업했다. 먹은 송연을 쓰고 종이는 시중에 파는 한지, 조각도는 철 펜을 거꾸로 쪼아서 갈아쓰며 우산살을 갈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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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조 '낙동강' <대구미술관 제공>

◆판화에 대한 철학… "판화는 찍히는 맛이 있어야"

김우조는 1940년대에서 1950년대 말에 이르는 동안 향토화단을 이끌어온 황토회와 대구화우회의 주도적 멤버였다.

선생의 작품 활동은 대부분 판화 제작으로 일관해 왔으며 1960년대 그는 독자적인 예술관을 형성했다.

학교에서도 판화교육과 보급에 힘썼으며, 1988년 정년퇴직을 하고 난 뒤에는 대구 봉덕동에서 홀로 연구실(화실)을 운영하며 작업에 일념했다.

선생의 작품은 주로 인물이나 골목 풍경 같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인물들은 선생이 포항과 구미 등지로 학교로 출퇴근할 당시 기차에서 만난 인물들이 많다. 말년에는 한층 자유로워진 표현기법들의 실험이 드러난 추상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선생은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토속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달성군 옥포에서 화원까지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계성중 졸업 후 부임한 학교도 거의 지방에 있었다. 통근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배명학 화백의 조언을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작업을 했다고 했다. "판화는 찍히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는 판화에 대한 그의 철학이기도 했다.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참조=임언미의 '우리 것' 탐구에서 판화를 만나다(월간 대구문화 2010년 2월호), 김우조의 '나의 삶, 나의 예술'(월간 대구문화 2001년 6월호), 임언미의 '격동기, 예술로 세상과 호흡한 그들을 만나다(월간 대구문화 2018년 11월호), 김영동(미술평론가)의 '독학으로 판화 장르에 도전-김우조의 생애와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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