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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재<시인> |
가끔 매혹적인 책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면 시간이 한참 지난 경우가 있다. 바로 그때 나는 '나'라는 울타리를 넘는다. 그림자처럼 존재가 늘어나는 것. 이를테면 겨울이 배경인 소설을 읽다가 한여름 귓불이 차가워진다든가, 멋지게 도약하는 시를 읽다가 흔들리는 모감주나무를 바라보는 것.
이런 경험은 흔히 사랑할 때 일어난다.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다가 용기를 내어 옆모습을 슬쩍 볼 때, 엄마 손을 잡고 대명동을 걷던 때, 허기진 아빠와 만두를 먹으러 약전골목에 갈 때, 기르던 개가 떠났을 때, 동생이 아플 때. 그렇게 그때그때의 때마다 나는 순정해져서, 아주 잠시 '시간 밖'에 있고는 했다. 사랑하는 대상의 말단(눈주름이나 손끝)을 눈에 담다가 온 세상이 골똘해졌던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동안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미지라는 새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러니까 문학은 시간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조금 다른 시간을 선물한다. 꼭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거나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잠시 '다른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간이 날아가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응 맞아. 그럴 수 있지 대니얼이 말했다. 문자 그대로 그렇단다. 자, 보렴./ 엘리자베스는 이날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릴 때 그들이 운하 제방을 따라 걸었던 일과 대니얼이 손목시계를 풀어 물속으로 던져버린 일은 기억한다./ 그녀는 그 전율을, 그 절대적인 지속성을 기억한다."(앨리 스미스, "가을" 中)
이 장면은 이러하다. 늙은 게이인 대니얼과 어린 소녀 엘리자베스가 함께 강변을 걷는다. 대니얼은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뛰어난 여성 화가(폴린 보티)의 삶과 끝을 보았다. 물론 그 자신도 소수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어린 미래(소녀)와 걷고 있다. 그것도 시간의 상징이라 불리는 강변을. 그리고 소녀가 말한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Time flies. 이 말을 듣고 대니얼은 손목시계를 푼다. 시간이 정말 날아가fly 버릴 수 있단다. 그 놀라운 장면을 보여줄까. 소녀는 끄덕인다. 대니얼은 미련도 없이 시계를 강에 던진다. 이 장면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그가 지나온 시간은 상처로 가득하지만, 그는 '다른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걸 소녀에게 보여준다. 그것도 비싼 손목시계를 강(역사, 시간)에 던져버림으로써, 아이에게 시간을 벗어난 경험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렇게 늙어버린 앞세대의 소수자 한 사람이, 미래 세대의 여성에게 새로운 시간을 선물한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시계를 던졌던 걸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건 사랑이 아닐까. 너는 내가 겪은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살기를. 현실적인 시간(손목시계) 따윈 벗어 던지고, 나아가길. 당당하길. 우리를 넘길. 너희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도래하기를.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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