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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재〈시인〉 |
누구에게나 다양한 처음이 있다. 첫사랑, 첫 등교, 첫돌, 첫인상, 첫 키스. 모든 처음엔 심장이 나란히 있다. 내게도 '아름다운 처음'이 있다. 어느 봄날 지루한 강의실에서 난생처음 시 수업을 듣던 때. 새로 부임한 교수가 강의실에 왔다. 교수는 볕 아래에서 책을 펼친 뒤 시를 한 편 천천히 읽어주었다. 그때 나는 이 스승과 시라는 미지를 영원히 사랑하게 될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영원까지는 모르겠지만 힘차게 사랑하고 있다. 그렇게 생뚱맞게 시가 왔고 나는 변했다. 다음의 소설도 비슷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슬론이라는 늙은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낭독한 뒤에 한 학생에게 이렇게 묻는다. 스토너 군, 이 소네트의 의미가 뭐지?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존 윌리엄스, '스토너' 중에서)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 없이도 스토너는 지금 사로잡혔다. 온 세계가 뒤집혀서 되살아난다. 시 한 편이 손끝과 솜털, 햇빛과 동료를, 강의실 전체를 새롭게 빚는다. 그렇게 시는 소리 없이 사람을 쪼개어 원자 단위로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든다. 다시 보는 사랑. 다시 '처음'을 만들기. 문득 잠든 엄마의 얼굴에서 사랑을 보듯.
"첫사랑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첫째도 복수형이 될 수 없다. 첫인상도 첫 만남도, 첫 삽도 첫 단추도 첫머리도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첫눈은 무한히 반복된다. 해마다 기다리고 해마다 맞이한다."(김소연 '한 글자 사전' 중에서)
첫눈이란 말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해마다 반복되는 처음이라니. 아름다운 신생(新生)을 계속 발견하는 것. 시인은 이렇게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반복 가능한 처음'을 발굴한다. 이를테면 첫걸음은 매일 반복할 수 있다. 오늘의 첫 커피를 귀하게 따르자. 첫 열차를 타고 당신 동네로 갈까. 아주 느리게 맑은국의 첫술을 뜬다. 그렇게 매 순간, 주변을 다시 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아기 엉덩이처럼 말랑해진다. 그렇게 시가 온다. 어김없이 반복하면서, 첫눈처럼 우리를 흔들 것이다.고명재〈시인〉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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