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장 폴 사르트르 '구토'…삶에 이유는 없지만 희망은 존재…위선자들에 보내는 영원한 작별인사

  • 오은하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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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8 06:45  |  수정 2022-10-28 06:49  |  발행일 2022-10-28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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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극작가, 비평가이면서 철학자였고 사회적 발언을 그치지 않은 지식인이었던 사르트르는 글쓰기와 진정한 자유의 추구라는 두 궤적을 따라 평생 모든 분야에서 펜을 휘둘렀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작가는 제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따르겠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소설 '구토'(1938)는 사르트르가 첫 번째로 출간한 문학작품이자 그를 단번에 문제적 작가의 반열에 올린 글이다.

'구토'를 이야기로 정리하자면 줄거리는 단순하다.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사람이 부빌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도서관, 카페, 공원 등을 전전하며 책을 한 권 쓰려다가 포기하고 부빌시를 떠나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로캉탱의 일기로 구성된다. 그가 일기를 쓰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무심히 보고 지나치던 문손잡이, 의자, 거울 속 자기 얼굴,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수상하고 두렵게 여겨지고 구역이 치밀어오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물들을 만지기가 어려워진다. 물수제비를 뜨려다가 돌멩이를 떨어뜨리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종이를 주우려다가 줍지 못한다.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로캉탱의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진다.

"나무뿌리, 공원의 철책, 벤치, 잔디밭의 듬성듬성 자란 잔디,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사물들의 다양성, 그들의 개아성(個我性)은 외관, 반들거리는 표면일 뿐이었다. 이 반들거리는 표면이 녹아내리며, 흉측하고, 물렁물렁하고, 무질서한-벌거벗은, 그 소름 끼치는 음란한 나신의-덩어리들만 남았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사물들의 이름과 사용법이 사라져버리자 존재의 속살이 드러난다. 자기 마음대로 흘러넘치는 존재들 앞에서 생각과 말은 힘이 없다. 이렇게 세계의 질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 '구토'가 치민다. 존재란 그저 거기 있는 것일 뿐이며 모든 존재는 쓸데없이 더해진 잉여라면, 나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존재에 대한 환상 깨지며 구토 치밀어
선망받는 의사·위인들 양면성에 혐오
권력에 의존하는 '개자식'이라며 비난
우연히 발견한 '또 다른 세계' 통해 구원


로캉탱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존재에 근거와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확고한 자기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과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두 부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던 로캉탱은 백발이 멋진 의사 로제씨가 당당한 태도로 카페에 들어서다가 거기 있던 아실씨라는 부랑자를 보고 저런 미친 노인네를 손님으로 받느냐며 불평하는 모습을 본다. 연륜과 지혜라는 말로 포장되는 과거를 가진 의사 로제 같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남들을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아실씨는 누구에게나 무시당하면서도 반발하기는커녕 동조하고 비굴하게 군다. 현재의 개인은 과거 시간의 집적이며 그 과거는 명백히 의미가 정해져 있다는 믿음을 양쪽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집약된 곳이 박물관이다. 어느 날 로캉탱은 부빌시 명사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박물관을 방문한다. 지혜와 경험의 표상인 모범적인 위인들의 얼굴이 관람객들을 내려다본다. 이 얼굴의 주인인 지역 유지들은 건물을 세우고, 돈을 벌고, 파업을 분쇄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느라 바빴다. 전시실에서 등을 돌리고 걸어 나오면서 로캉탱은 "잘 있어라, 이 개자식들아.(아듀, 살로.)" 하고 작별 인사를 보낸다. '개자식들'로 번역된 '살로(salauds)'는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경멸할 만한 사람들을 말하는 욕이다. 이들은 왜 살로인가? 자신이 수용한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사회적 가치가 객관적이라 굳게 믿으며, 그것으로 자기 존재의 우연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삶의 우연성이 어렴풋이 느껴질 때 권력과 전통에 의존함으로써 도피하려는 '살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연성을 돌파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는 '독학자'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휴머니즘을 이정표로 삼은 사람이다. 책을 대할 때 "뼈다귀를 찾아낸 개 같은 표정으로" 다루는 듯 보일 만큼 그의 지식욕은 맹렬하다. 서가에 꽂힌 책을 알파벳 순으로 모조리 읽을 정도로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무조건 존중하던 그는,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어린 학생의 손을 어루만지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결국 도서관에서 쫓겨난다. 로캉탱의 연인이었던 안니는 일상에서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에 집중해 그 시간에 엄격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소설이나 영화처럼 살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안니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자에게 의존해 사는 통속적 삶을 이어간다. 이들의 실패를 보며 로캉탱은 자신이 매달리던 역사책을 쓰는 일 역시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 부여잡았던 환상임을 인정한다. 책도 포기하고 독학자와 안니와의 관계까지 모두 끝난 로캉탱 앞에 남은 삶은 죽음과도 비슷한 '버섯 같은 삶'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빌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단골 카페에 들른 로캉탱은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듣다가 한순간 어떤 다른 세계를 엿보았다고 느낀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절정으로 치닫는 완결된 세계, 실재하지 않지만 현실의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리고 음악을 만든 작곡가와 가수가 '구원받았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이 음악을 듣고 창작자를 생각해 주었기 때문이다. 로캉탱은 가족도 직업도 친구도 없는 홀로 있는 인간이어서 진리를 은폐하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존재의 우연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 있다는 것은 삶을 텅 비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재즈음악을 들으며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무언가 오간다는 느낌을 받은 로캉탱은, 자신도 무언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불씨를 다시 얻는다.

작품이라는 매개를 둘러싸고 작동하는 새로운 관계의 경험이 다른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구도는 훗날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수용자에 대한 호소로서의 작품'이라는 문학론을 예견케 한다. 우리가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이 삶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은 기만이다. 그렇지만 그 삶에는 재즈음악이 로캉탱에게 준 희열 같은 짧은 구원이 깃들기도 한다.

오은하 교수(연세대 불어불문학과)
공동기획 : KNU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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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하 교수(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오은하 교수는?

연세대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서울대와 파리3대학에서 공부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을 말하는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을 읽고 매료되어서 그의 문학을 전공했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폴 니장,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아니 에르노 등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한 작가들의 글을 주로 연구한다.

현재 관심 분야는 알제리전쟁 시기 사르트르의 반식민 글쓰기를 통해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재조명하는 일이다.

최근 논문으로 「되살아난 죽은 자의 폭소: 사르트르, 「벽」에서 '웃음'의 중첩적 의미」, 「폭력 없는 증여라는 꿈: 사르트르, '악마와 선한 신'의 괴츠와 힐다」, 「수치는 어디서 오는가: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바리케이드 위에서 보는 지평선: '레 미제라블'의 프라테르니테」 등이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인간의 재구성' '사르트르의 미학' '카페 사르트르' '검은, 그러나 어둡지 않은 아프리카' 등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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