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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현지<곽병원 홍보계장> |
이태원 골목길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되고 있다. 이곳은 나에게 낯익은 거리다. 17년 전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이태원 거리로 소개팅을 하러, 혹은 친구들과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으러 다니곤 했다. 미군 용산 기지가 근처에 있어서 미군이 많이 다니는 이태원은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거리였는데 연예인 셰프로 유명한 홍석천 사장이 음식 가게를 여러 곳 운영하면서 대학생이 즐겨 찾는 트렌디한 핫플레이스로 진화했다. 이태원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메인 카페 거리로 올라갈 때는 주로 해밀톤호텔 우측의 오르막길을 이용하고 귀가 시에는 이번 참사 현장인 좁은 골목길을 이용했다. 경사가 가팔라서 하이힐을 신고 다니기에는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각종 축하 모임이나 주말·공휴일에 데이트하러 즐거운 마음으로 찾던 곳이기도 했고 학창 시절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친구들과 함께 모이던 아지트이기도 했다. 좋은 대학만 가면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았던 부모님 세대로부터 '돈은 아빠가 벌 테니 너희들은 공부만 해라'는 말만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에 온 친구들과 모여 좌절감, 듣던 바와는 동떨어진 현실을 토로하며 서로 위로해 주기도 하고 이태원 거리가 주는 흥겨움에 잠시 불확실한 미래를 잊어보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대학 동기 S양과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큰 기업의 후계자였던 S양은 20대 학창 시절 외제차로 통학하고 명품 옷과 가방도 많아서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받던 친구였다. 하지만 부친의 기업이 부도가 나고 집안 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던 S양은 필자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생일이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직접 미역국을 끓여주고 생선을 구워주고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S양은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마음속 고민과 괴로움을 나에게 털어놓곤 했다. 타고난 집순이 스타일이었던 나는 밤늦은 시간 돌아다니는 것이 곤혹스러웠지만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선 친구를 위로하느라 함께 이태원 거리를 돌아다녔다. 돌이켜 보면 이태원 골목길은 나의 20대 시절 사랑, 우정, 고민의 흔적이 담긴 곳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나는 요즘 스포츠센터나 모임에서 10~20대 젊은이들을 보면 피톤치드를 쐬듯 힐링받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회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회식하느라 밤늦게 귀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학교·학원 등하원까지 뒷바라지해 주셨던 어머니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취업, 경제적 독립, 결혼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현실에 마음 아픈 젊은이들이 있다. 17년 전 나처럼 '미래가 막막하다'며 힘들어하는 까마득한 후배들을 가끔 만난다. 본인들은 힘들어하지만 젊음 그 자체만으로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곤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이태원 골목길에서 떠나보낸 슬픔을 필자 또한 표현할 방법이 없다.곽현지<곽병원 홍보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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