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사회주의 혁명 속 방황하는 카자크인 그리고리의 삶과 사랑

  • 변춘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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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23 06:55  |  수정 2022-12-30 07:51  |  발행일 2022-12-23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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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고향 저택박물관 앞 돈강가의 그리고리와 악시냐의 등신대. <변춘란씨 제공>

러시아 독자에게도 생소한 카자크
돈강 장대하게 감싸흐르는 초원서
자유롭게 살았던 민족의 비극 표현

혁명과 내전 어느 쪽에도 못 섞인 채
모두 따뜻하게 살아갈 진실마저 상실
그리고리의 내면 파노라마처럼 표현
격동의 역사 빠짐없이 그려낸 대서사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나이 어린 여주인공 나타샤를 문득 '귀여운 카자크'라 불러놓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 톨스토이는 카자크에 관한 중편소설 '카자크 사람들'을 집필한 바 있다. 19세기에만 해도 고골의 '타라스 불바'에서처럼 카자크인들은 러시아 민족의 자유 애호와 낭만적 이상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 그려진 카자크는 유사한 전통을 공유하기는 해도 역사적, 공간적 배경을 달리하는 두 집단이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은 대략 15세기경부터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를 시작으로 변경 지역 이곳저곳의 대규모 강을 끼고 살던 카자크인들에 대한 일종의 신화적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의 '고요한 돈강'(1925~1940)은 20세기 초반 세계사적 변혁이 일어나던 시기 당시 러시아 독자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던 돈강 카자크 집단을 그려냈다.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러시아 남부의 돈강 북부 카자크 마을 뵤셴스카야에서 태어난 작가는 앞서 언급한 두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아 백 년 전 돈강 카자크 세계에 관한 대서사를 펼쳤다. 돈강이 장대하게 감싸 흐르는 야생의 초원 지역은 돈 카자크 집단이 오백 년을 살아온 곳이다. 그들은 기마병으로 러시아 제국에 장기간 복무하는 대신 토지를 자체 분배하는 등 얼마간의 자치권을 특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곳 변경 지역의 독특한 자치 질서와 문화는 제국의 중심부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숄로호프는 카자크는 아니었고, 이주민의 자손인 만큼 카자크 사회를 직접 겪으며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치우침 없이 관찰할 수 있는 처지에서 성장했다.

'고요한 돈강'은 1차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혁명, 그 뒤를 이은 내전이 자유를 애호하며 자유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을 뿌리째 흔들어, 신생 혁명 정권에 얼마나 잔인하게 종속시켰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돈강 카자크식 '평화와 전쟁'에는 내전 시기 자행된, 이른바 카자크 해체 정책의 비극이 짙게 스며있다.

소설은 돈강 상류 초원의 타타르스키 마을의 뭔가 심상찮은 멜레호프 농가를 묘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대가족 농가는 마을 끄트머리 돈강 언덕배기에 위치한다. 낯선 튀르크 여인의 피가 섞여든 이 집의 아버지를 닮은 다혈질의 청년 그리고리는 이웃집 스테판이 군사훈련을 떠난 사이 그의 아내 악시냐와 떠들썩한 애정행각을 벌인다. 앞날에 등장인물들이 겪게 될 파국적인 역사의 소용돌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리고리는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마을 부농의 딸 나탈리야와 결혼하지만, 그녀와 원만한 결혼을 이어가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가 입대한 뒤 벌어지는 서사시적 규모의 역사적 시련의 모험에 나서는 이야기가 소설의 큰 줄기다.

멜레호프네는 당시 카자크 사회에서 중간자에 가까운 중농이며, 그리고리는 둘째에다 왼손잡이, 정확히는 양손잡이이다. 이러한 조건은 그리고리가 나중에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그 후 벌어진 혁명과 내전 과정에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깃들지 못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암시한다. 소설 초반의 교차 지점이라는 공간 설정은 카자크 집단의 역사를 대변한다. 이로써 주인공 그리고리는 한 사람의 개인인 동시에 카자크 집단의 길 찾기와 방황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아간다.

그는 초원에서 풀 베기를 하던 날 낫질에 걸려 죽은 새끼오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전선에서 앳된 적군 병사를 찔러 죽인 후 번민을 거듭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전선에서 기마병으로 복무하다가 타고난 자질과 재능에다 냉혹함까지 발휘해 훈장을 휩쓸어 장교의 지위에 오른다. 이어서 혁명 후 적위군에 남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적위군에 맞선 카자크 반란군 사단장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반란군이 백위군과의 피치 못할 협력으로 내몰리자 그는 이들과 협력할 근거를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백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흰 까마귀' 같은 존재라고 느낀다. 이리하여 그는 '한 날개 아래서 모두가 따습게 살아갈 진실' 찾기에 회의하고, 결국에는 길을 완전히 상실하는 상황에 빠져든다. 하지만 전쟁이 모두의 야수화를 촉발하고 온갖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그는 내면적 자유의 영역만은 지키는 인물이다.

혁명사의 굵직한 줄기가 여러 갈래로 펼쳐지는 소설의 서사적 중심에는 각양각색의 타타르스키 마을 사람들을 비롯한 카자크 민중의 삶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실감 나게 펼쳐진다. 돈강을 둘러싼 자연의 법칙과 감각에 공고하게 뿌리내린 그들은 특히 어디서나 노래와 춤을 즐기고 고단한 삶이 녹아든 농담을 주고받을 줄 아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이다.

더불어 이 작품의 어떤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풍경묘사, 웃음과 유머 외에 작품 곳곳에 내장된 구전문학의 요소들은 주목할 만하다. 전승되던 구전문학이 때로는 등장인물이 부르는 노래로, 때로는 그들의 대화와 저자의 서정적 일탈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저자는 지역 사투리를 자신의 문체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눈 덮인 겨울날 초원에 부는 바람을 '동풍이 고향 초원을 따라 카자크짓을 한다'고 묘사한다. '카자크짓'은 제멋대로 바람이 이동하는 모양새를 의인화한 표현이다. 앞에서 언급한 톨스토이의 '귀여운 카자크'는 이런 카자크짓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작품 제목 '고요한 돈강'은 작품에 인용된 민요 등에서 널리 쓰였던 표현을 활용한 것이다.

모스크바 중심가의 아름드리나무가 늘어선 고골 가로수길에 들어서면 중간 어디쯤서 강에서 배를 젓다가 잠시 한숨 돌리는 숄로호프를 형상화한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배 주변에는 강을 건너는 말들의 머리만 드러나 있는데, 이 말들 무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이념을 앞세워 잔인한 전투를 불사한 세력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채 위대한 작품을 창작해 낸 작가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은 것이다.

사실상 모순적인 작가라고 할만한 숄로호프는 이 작품 전반부가 출판되자마자 '붉은 톨스토이'라 칭송받았고,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문학적 성취는 세계적 냉전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의 공인이라는 보기 드문 결실을 얻었다.

변춘란 <번역가>
공동기획 : KNU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변춘란
변춘란 번역가

경북대와 모스크바사범대학에서 숄로호프의 소설을 연구했다. 러시아 전문 번역가로 러한, 한러 번역을 하며, 2017년부터 러시아인과 번역팀 '미래짓'을 운영하며 온라인상에서 주기적인 번역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언어의 장벽을 걷어내는 다시 쓰기로서의 번역 역량 강화와 그 저변 확대에 관심이 많다. 지금은 모스크바에서의 박사과정 시절 완역해 둔 '고요한 돈강'의 출간을 준비하는 중이다.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지원 공모사업에 선정(2019년)돼 소설가 현기영 단편집('순이 삼촌' 등 5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한국어 번역서로는 '한국 학습자를 위한 러시아어 수업 연구'(공역·2019), 톨스토이 사상집 '죽이지 마라'(2021),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2022)가 있다. 이와 더불어 공저 '노벨문학상 수상작 산책'(2022)이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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