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노래 싱어송라이터 진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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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20 07:51  |  수정 2023-01-20 08:46  |  발행일 2023-01-20 제34면
전국의 시인 품어 만든 詩노래…23년간 1400여곡 작곡, 9집 음반까지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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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과 시낭송을 노래로 갈무리해 나가는 시노래 전도사 진우씨.

한국의 '시노래' 전통은 일천한 것 같은데 상당히 장구하다. 일반 전통가요와 성인 트로트 그리고 록뮤직, 여느 유행가는 가수한테 맞는 가사를 절묘하게 만들어 내는 전문 작사가의 몫인 경우가 많다. 양인자가 조용필에게 준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 김국환의 '타타타' 등은 그 어떤 시인의 시보다 더 시문학적이었다. 김민기, 한대수, 조동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김광석, '어느 산골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지은 예민, '사랑으로'의 이주호(해바라기 리더), 이문세에게 노래를 준 이영훈 등도 음유시인의 반열에 들어간다.

하지만 시노래란 장르는 빼어난 시인의 시 그리고 그 정서를 이해하는 작곡가가 매칭되었을 때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정호승의 시와 인연이 깊은 안치환,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노래로 만든 송창식, 김소월의 '개여울'을 노래로 부른 정미조,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정지용 시인) 등도 한국 시노래의 출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진우, 김현승, 백창우, 박경하, 김무한, 성경원, 이경민 등도 국내 시노래 문화 저변 확대에 일조했다. 특히 경남 합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성장한 진우(61)는 23년 구력의 자타가 공인하는 시노래 싱어송라이터이다.

성악가보다 적성에 맞는 대중가수
공연 행사 종합이벤트사에 몸담아

지역 대표 시인들이 제안한 시노래
詩에 맞는 멜로디·리듬·템포 작곡
낭송·낭독과 차별화 콘서트 마련

내가 만든 시노래 직접 부르며 전파
삼국유사 노래·이상화 시노래음반
다양한 문화 공연 총연출 진두지휘


◆성악가에서 변신

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내 대구로 건너와 양복점 주인이 된다. 그는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랐다. 그림쟁이·음악쟁이·글쟁이의 유전자를 겸비했다. 그림대회는 물론, 신라문화제·진해군항제 음악콩쿠르에서도 큰 상을 받는다. '화가냐, 성악가냐, 때로는 시인이냐 그게 문제'였던 학창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성악을 잡는다. 중앙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실제 강단에서 전문적으로 성악가의 능력을 키우는 과정은 너무 학문적이고 구속도 많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클래식보다 대중가수적 기질이 강했다.

틈만 있으면 라이브카페에서 대중가요와 팝송을 불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김민기의 '친구',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 등을 부를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제대했지만 복학하지 않았다. 자연 성악가의 길은 지워진다.

서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왔다. 옛 중앙상고 근처에서 기타학원을 겸한 악기사를 꾸려간다. 밤에는 동성로의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악기사도 접고 중앙파출소 근처에서 '음악도시'란 레스토랑을 오픈한다. 세상의 근육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점차 자기가 원하는 공연 및 음악행사를 기획·연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놀레벤트, 파워이벤트 등 대구 1세대 공연기획사가 출범하는 흐름과 맞물려 그도 '이벤트피아'란 종합이벤트사를 오픈한다. 직접 노래 부르는 일은 잠시 중단하고 대구은행 창사기념, 대구장애인의 날 행사 등을 꾸려갔다. 그렇게 삼십 대 시절은 그럭저럭 흘러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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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노래 음반.

◆마흔에 만난 시노래

시조시인 겸 시낭송가로 활동 중인 곽홍란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기철, 문인수 등 지역의 대표 시인 10명의 시를 갖고 CD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자리에서 시노래를 불렀지만 큰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계열의 노래를 좋아하고 흥얼거리는 수준이랄까. 그런데 지역에서 나름 잘나가는 시인의 시를 갖고 곡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엄청나게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유랑자처럼 경험했던 여러 예술적 끼를 전문적으로 융복합해야만 했다.

일단 시를 정독했다. 한 편의 시에 숨어 있는 울림의 각도를 기승전결로 분석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에 맞는 멜로디와 템포, 리듬 등을 찾아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편곡자에게 편곡을 의뢰하고 그걸 토대로 반주 음악을 형성하고, 마지막엔 직접 스튜디오에서 노래하며 음반을 제작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10곡의 시노래가 작곡된다. 동아쇼핑 비둘기홀에서 시노래 음반 기념 콘서트를 가졌다. 하지만 역시 일반인에게는 시노래란 장르가 생소했다. 대다수 시낭송의 연장이라 여겼다. 낭송·낭독·노래의 차이점, 그는 그걸 사람들에게 각인해야만 했다.

그 무렵 김현승이 이끄는 시노래 단체인 '느린 달팽이'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시노래를 갖고 단독 콘서트 형식으로 엮은 건 그가 가장 선두적이었다. 그가 시노래를 시작할 무렵 통기타 라이브카페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GOD, SES 등 브레이크댄스를 앞세운 힙합문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신세대의 음악과 기성세대의 음악, 그 불일치의 접점을 파고들었다. 음악적으로 소외받을 수 있는 폐교 직전의 오지 학교를 찾아 자신의 시노래를 전파하고 싶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성사된 게 군위군 고로중·고 등 100명 미만의 외딴 학교를 중심으로 시노래 투어 콘서트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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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이상화 시노래 음반 7집.

◆시노래는 어떻게 생산되나

"여보세요. 시노래풍경 진우 선생님이시죠. 저는 인천에 있는 문학단체 사무국장인데요. 혹시 이번 주말에 시노래 공연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시 두 편을 보내 드릴 테니까 작곡해서 시노래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10년 전 어느 문학단체 관계자와 통화한 내용이다. 이렇게 요청을 받으면 대략 두 주일 안에 작곡을 하고, 완성된 시노래를 행사장에서 부르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인천에 있는 문학단체 행사장까지는 승용차로 왕복 8시간 거리. 그는 그 긴 시간을 대개 혼자서 차를 몰고 다닌다. 정작 출판기념식과 문학공연, 문학제 등 각종 행사장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7분이다. 노래 두 곡에 그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개의 문학행사는 음향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음향시스템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경우도 많다.

무대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되돌아오는 4시간은 지옥과 같다. 반대로 만족스럽게 공연을 마치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름대로 행복해진다. 간혹 문학이 아닌 회화와 서예, 서각 등의 전시 개막행사에서 공연을 하며 외도를 하기도 하지만 그와 문학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시노래 저변 확대

그도 시노래 갖고 오디션 스타 박창근, 김호중, 임영웅처럼 유명해질 뻔했다. KBS '낭독의 발견'이란 코너에도 초대돼 김선우 시인의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직접 작곡해 노래를 불렀다. 반응이 좋았다. 재차 MBC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충북 옥천에서 진행되는 매머드 행사에 메인으로 출연 교섭을 받았다. 그는 혼자 너무 오버했다. 뭔가 한 방을 보여주기 위해 7인조 밴드를 급조했다. 하지만 연습도 부족했고 결과는 참담.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기타 한 대로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으면 더 좋았겠다'고 후회한다. 그날 이후 그는 중앙을 겨냥하는 야심을 버렸다. 그냥 '순리대로 시노래 하는 진우'로 살다 죽기로 맘을 먹는다. 그런 마인드 덕분인지 다양한 시노래 관련 공연을 총연출할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

대표적인 게 도권 스님과 함께 진두지휘한 군위 인각사 '삼국유사문화축전'이었다. 그걸 계기로 삼국유사 관련 4편의 뮤지컬을 제작한다. 단군, 조신의 꿈, 수로부인, 그리고 비형랑이다. 2014년 행사 때는 고은 시인이 쓴 '일연찬가'를 노래로 만들어 직접 노래했다. 서예가 율산 이홍재는 커다란 붓을 이용한 타묵 퍼포먼스를 펼쳤다. 2012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한불교조계종 대승사(주지 철산 스님)에서는 '대승사 문화축제'도 연다.

그의 시노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국의 여러 시인을 품었다. 시인이 먼저 요청해서, 자신이 좋아 보여 시노래를 작곡했다. 일반 공연무대와 일반 시낭송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게 적중했다. 한동안 그는 대구문인협회 전속 시노래가수로 활동하다시피 했다. 시노래 특수 덕분이다. 시낭송의 단조로움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방위로 뻗어 나갔다. 시노래만 1천400여 곡을 작곡했다. 삼국유사의 노래, 이상화 시노래음반, 2017년에는 시노래음반 9집을 펴냈다. 김달진문학제, 대구포크페스티벌 등 여러 문화 공연을 진두지휘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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