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항. 등대를 바라보는 낮은 언덕이 신선암이다. 신선암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융기문토기와 무문토기, 삼국시대의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4천500년 전 이 바닷가에 사람이 살았다. 그들은 흙을 빚어 작은 인형을 만들었는데 잘록한 허리, 어깨보다 조금 넓은 풍성한 엉덩이, 봉긋한 젖무덤을 가진 여성의 모습이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3.6㎝의 아주 작은 토루소, 처음부터 그리 빚었는지 어느 날 파손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신암리 비너스'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흙으로 만든 귀걸이와 작은 배, 의도적인 훼손을 보이는 돌칼이나 작살, 일본 큐슈 나가사키현이 산지인 흑요석과 사누카이트 등도 발굴되었다.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학계에서는 신석기시대 신암리를 교류의 중심지이자 풍요와 안전을 염원하는 의례의 공간으로 추정한다.
무지개길 끝자락 키 큰 건물이 신암경로당이고 그 뒤편 훌쩍 솟구친 소나무 아래에 당산 할매집이 있다. 할매는 바다를 지킨다.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운암동(雲岩洞)'이란 빗돌과 바위가 울타리 안에 보존되어 있다.
해안에는 보드라운 모래밭이 소규모로 펼쳐져 있고 동글동글한 바위들이 툭툭 놓여 있는데 계란처럼 껍질이 벗겨지는 형상이라 해서 공돌 또는 알돌이라 부른다.
◆ 신암리 신암포구
선사시대가 지나고 역사시대가 도래한 이후 신암리의 내력은 1천 년 정도 된다. 처음 윤씨가 마을을 찾아 들어왔고 그 후 안씨, 이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세월이 흘러 세 성씨의 대표들이 마을이름을 짓기 위해 모여 의논하였는데 그들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구름 '운(雲)'자와 바위 '암(岩)'자를 따서 운암동이라 정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는 군령리였고 고종 때는 운곡, 군령, 신리 3개 동으로 나뉘었다. 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신암리가 되었다. 신리의 신(新)과 옛 이름 운암의 암(岩)을 딴 이름이라 한다. 지금 신암리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소재지이며 신암과 신리가 바닷가 포구마을로 자리한다.
신암마을은 광복 이후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당시 신암회관을 중심으로 서남쪽은 중리, 동북쪽은 송리로 나누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단다. 그러나 결국은 성공한 듯하다. 신암경로당을 중심으로 남쪽 고샅길 이름이 신암중리길, 북쪽은 송리길이다. 송리길 앞바다에 신암항이 있다. 내항은 넓고, 오늘 잔잔하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제법 많은 어선들이 느슨히 밧줄을 잡고 이따금 움찔대는데, 높은 방파제와 수없이 부려진 테트라포드가 언제 닥쳐올지 모를 바다의 힘을 보여준다. 신암항 방파제 끝에 흰 등대가 서 있다. 철로 만든 8.1m 높이의 저 등대에 대해 누군가는 16조각 병풍을 오므려 부채꼴로 세워둔 모습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왕관 같다 하고, 또 누구는 맥주잔 같다고 한다. 본래의 모티브는 '우산이 접혀진 형상'이다. 나는 꽃병 같아서 가득 꽃을 꽂고 싶다.
등대를 바라보는 낮은 언덕은 신선암(神仙岩)이라 불린다. 봄, 여름 바다로부터 안개가 일어나면 바위가 안개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한다. 신선암 위에 팔각정자가 신선처럼 앉아 있다. 저 신선암 주변에서 신석기시대 융기문토기와 무문토기, 삼국시대의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신암리에 신석기시대 유물이 처음 발굴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忠)에 의해서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66년과 1974년, 1989년에 이루어졌고 '신암리 비너스'는 1974년에 발굴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비너스 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대표적인 여인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 비너스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작은 배, 훼손된 돌칼, 흑요석, 그리고 신암리 비너스. 3천500년 전 이 고요한 바닷가는 어떤 풍경이었을까.
신암항 초입에 신암경로당이 있다. 그 뒤편 훌쩍 솟구친 소나무 아래에 당산 할매집이 있다. 할매는 바다를 지킨다. 남쪽으로 무지개길이 이어진다. 바닷가에는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운암동(雲岩洞)'이란 빗돌과 바위가 울타리 안에 보존되어 있다. 해안에는 보드라운 모래밭이 소규모로 펼쳐져 있고 동글동글한 바위들이 툭툭 놓여 있는데 계란처럼 껍질이 벗겨지는 형상이라 해서 공돌 또는 알돌이라 부른다. 가장 큰 알돌 정수리에 갈매기 한 마리 깃발처럼 서 있다.
신리항. 일제강점기 때는 정어리 어업과 수산물 수출의 중심지였고 해방 이후에는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이었으나 원전 건설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신리항의 해녀집. 980년대만 해도 해녀가 160명쯤 됐다 한다. 봄에는 미역, 여름에는 성게, 가을에는 소라를 잡았고 비가와도 파도만 잠잠하면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신리항 입구 도로변에 500년 넘은 당산 곰솔과 당산 할배집이 있다. 할배는 육지를 지킨다.
◆ 울산의 가장 남쪽 바다, 신암리 신리포구
무지개 길 끝에서 남쪽으로 신리길을 따라가면 신리포구다. 고리의 북쪽, 솔숲이 병풍으로 둘러선 신리는 현재 울산의 가장 남쪽 포구다.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경주 김씨로 알려져 있으나 시기는 알 수 없고 운암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리(里)로 바꾸는 과정에서 신리(新里)가 되었다고 한다. 작고, 조용하고, 내항의 요트는 이색적이다. 옛날 마을 앞바다에는 백사장이 있었고 모래밭이 꽤 넓어서 가설극장이 들어서곤 했다고 전한다. 한 남자가 발아래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섰다. 남쪽 솔숲 아래에는 몇 대의 차가 정지해 있다. 이곳은 적적함과 단조로움을 찾아 온 사람들의 차박지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정어리 어업과 수산물 수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고 한다. 일본인 주도의 어업조합에 대항해 우리 어민들은 서생어업조합을 조직했는데 그 사무실이 신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해방 이후에는 붕장어와 미역 양식 등으로 명성이 높아 신리항은 붕장어를 일본으로 수출하는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고대의 교류가 침략과 새로운 교류로 이어진 셈이다. 신리는 1970년대에는 고리원전이 들어서면서 이주, 해체, 편입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바닷가에 작은 해녀집이 있다. 문 열린 해녀집 앞에 무가 손질하다 만 채로 쌓여 있다. 김장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1980년대만 해도 해녀가 160명쯤 됐다 한다. 봄에는 미역, 여름에는 성게, 가을에는 소라를 잡았다. 비가와도 파도만 잠잠하면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오백 살 먹은 당산 곰솔과 당산 할배집이 있다. 할배는 육지를 지킨다. 신암리 사람들은 조상신인 '시준', 집안을 관장하는 '성주', 부엌의 신 '조왕', 재물을 관장하는 '업',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 임신과 출산을 관장하는 '삼신',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 등 가정을 수호하는 수많은 '가신'을 모신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 아플 때면 온갖 신들을 불러내어 객귀를 물린다.
'어어쉐이/ 이놈의 구신아 니꼬라지를 봐라/ 니꼬라지를 봐라/ 니가이거를 받아가 안돌아서는 날이머/ 니를 신장님을 불러가주고 부린다/ 천하신장 지하신장 아기자기 거무신장/ 일광신장 월광신장 노성하던 백락신장/ 장수신장님 돌아오신다/ 어어쉐이 이거를받어가 썩돌아서거라/ 니가 안돌아 서는 날이머/ 은나무발에다 쉰질청수에다가 무쇠가메다가 푹푹 삶아가/ 니를 내가 죽일끼다/ 어어쉐이.'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기원의 흔적이 수많은 신으로 이어진 것일까. 조용한 바닷가에서 속으로 외친다. 어어쉐이. 어떤 아픔도 다 나을 것 같아서.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여행정보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 가다 대감분기점에서 600번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기장방향으로 간다. 기장IC에서 내려 31번 국도를 타고 기장, 일광 방향으로 직진, 신암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직진해 가다 덕골재길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하면 울주 서생면소재지다. 서생면 행정복지센터 앞 삼거리 지나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신암항, 신암해안길에서 신리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신리항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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