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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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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다르덴 형제의 '토리와 로키타'가 초청되었다. 다르덴 형제는 벨기에 출신으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두 형제를 일컫는다. 늘 함께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개인의 이름보다는 '다르덴 형제'가 이들을 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셈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 다르덴 형제는 극영화 '라 프로메제'(한국명 '약속')를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이 되었고, 어린 현장실습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다룬 영화 '로제타'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유럽을 대표하는 사회파 감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더 차일드' '자전거 탄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 등이 계속해서 칸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명실공히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유럽에는 다르덴 형제와 늘 함께 언급되는 사회파 감독으로 영국 출신의 켄 로치가 있다. 켄 로치 역시 칸 영화제에서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으며, '레이닝 스톤' '빵과 장미' '내비게이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 때문에 그를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리얼리즘 감독이 만든 영화의 공통점은 곤경에 빠진 가난하고 소외된 인물이나 평범한 노동자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드라마틱한 전개나 장르적 색채도 크지 않다. 이들의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시선과 이를 바탕으로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수십 년째 사회의 부조리와 약자들이 처한 현실을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내는 한결같은 의지와 저력이 이들을 더욱 존경받는 감독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은 태초의 인류와 함께 온 그 시간만큼 오래된 것이기에 영화가 탄생한 1895년에 제작된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처럼 이미 노동은 영화의 오랜 주제였다. 이후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193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엘리오 페트리의 '노동자계급 천국으로 가다'(1972년) 등 시대를 대표하는 노동영화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검열과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중영화에서는 노동이라는 주제가 다뤄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가장 밀도 있게 담아내는 건 독립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투쟁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다룬 건 1990년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였다. 현재 제작자, 감독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은, 장동홍, 장윤현, 홍기선 등이 '장산곶매'의 주요 멤버였다. 101주년 세계 노동절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사에서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한국 영화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담고 있는 작품인 만큼 당국의 검열과 탄압을 피해 노동현장이나 대학가 등에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상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노동운동이자 저항이 되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려 30만명 이상이 이 영화를 봤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노동현장의 이슈를 속보 방식으로 전달하며 주류 언론이 감추어왔던 많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겼다. 2020년에는 '노동자뉴스제작단' 30주년을 맞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독립영화계를 중심으로 제작되던 노동영화는 이후 상업영화계로 점차 확산된다. 1995년 제작된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역사적 인물인 전태일 열사의 전기영화였다. 문민정부 시절임에도 일종의 금기였던 전태일을 다룬 최초의 상업영화로 개봉 당시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전태일이라는 세 글자를 각인했고,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수상과 더불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그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이후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또 하나의 약속', 대형마트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인 '카트' 등이 만들어졌다. 물론 독립영화계에서도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 감정원 감독의 '희수' 등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실험적 영화들이 등장했고, 전태일 열사에 대한 애니메이션 '태일이'도 제작되었다. 최근 개봉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이러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음 소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현장실습생이라는 청소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현장실습이라는 부조리한 제도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4월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최근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안타까운 사망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노동문제가 가까이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구에서만 작년 한 해 동안 21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한다. 열악한 현실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폐허 같은 노동의 현장을 견디며 힘들게 살아가는 삶이 있다. 가까이 있지만 잘 몰랐던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건 이러한 노동영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말은 '그저 인간적인 존중, 시민으로 대접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를 누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노동은 모두에게 당연하고도 평범한 일상이지만, 인간다움이 사라진 비정한 사회에 던지는 저 당연한 명제가 모든 노동자에게 작동하는 건 아닌 듯하다. 부디 또 다른 로제타, 또 다른 다니엘 블레이크, 또 다른 소희가 더 이상 없길 바라며, 영화라는 것이 이 비정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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