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세상 일에 관여하라, 참여 없는 세상 법이 판친다

  • 조성진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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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30  |  수정 2023-06-30 08:11  |  발행일 2023-06-30 제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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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복잡해진 삶의 문제를 과잉된 법의식으로 해결하려는 세태를 바라보며

세상은 나빠지고 있는가, 좋아지고 있는가. 가치중립적으로 말해보자. 세상은 복잡해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싸우면 옛날에는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하면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놀아라' 하는 동네삼촌 같은 덕담을 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학교폭력으로 간다. 학폭이 되면 실정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경찰도 개입한다. 복잡해졌다. 명쾌한 해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애들은 참아도 학부모가 못 참는다. 행정 또는 법으로 한다는 건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무시당하고 못 산다'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내가 누군지 몰라?' 하는 학부모도 있다. 이런 교육현장에 윤리나 도덕이라는 단어는 이미 쓰임새가 없다.


갈등해결 도덕적 기준보다 법 우선
기득권층 정당성 확보 도구로 삼아
법은 지배자가 자신 위해 만든 것



이렇듯 우리 사회가 요즘 들어 부쩍 '누가 이기나'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입시를 비롯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런 비평은 상투적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진짜 문제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기준점이 너무 많아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일반 대중은 어렵게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명료해 보이는 법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한편 전통적인 기준에 의거, 자신의 권위와 위상을 지킨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하며 새로운 도덕의 기준점을 찾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기득권층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이 획득한 경제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해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실정법을 정당성 확보의 도구로 삼는다. 이런 방식은 정부가 후쿠시마 핵폐기 오염수를 과학자를 내세워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명료해 보이는 법과 과학이 도덕적 기준을 대신한다.

◆한국인의 도덕관념과 당당한 몸

우리나라 사람의 윤리의식은 그 본바탕이 무엇이었든 간에 유교의 가르침을 기본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 대부분 예의범절이라고 하면 여기에 속한다. 선비에게는 수신이 중요한 덕목이며, 처신이나 몸가짐과 같은 말에서 올바름과 몸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늠름하고 활달한 기상은 젊은이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윤리다. 어른이 되면 채신머리없이 굴면 안 된다. 낯짝이 두꺼워도 안 된다. 체면을 지켜야 하며 모든 행동에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는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추고 주어진 역할을 여실히 수행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유교사회의 질서는 이러한 권위에 기초하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은사(恩賜)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카리스마가 이 권위와 같은 개념이다. 카리스마(charisma)는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공적으로 이롭게 쓰는 것을 말한다. 이 권위 또는 카리스마가 몸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당당함이다. 양반걸음은 명치 윗부분을 뒤로 살짝 젖혀 무게중심을 뒤로 보내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차며 다리를 앞으로 힘 있게 보내는 걸음이다. 당당함 그리고 호쾌함 그 자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그 당당함은 상처를 입는다. 지체가 높은 분들일수록 매국하고 변절하고 부역을 했다. 한편으로 단발령과 창씨개명도 있었다. 생활 속에 언제나 기둥처럼 서 있던 유교의 윤리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유교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권위주의는 이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리고 방어하는 기제가 되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당당함이 없음으로 권위주의정부가 되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서 권위는 덕목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유교의 덕목은 꼰대의 스타일로 전락했다. 당당함은 사라지고 엄숙과 심각만 남았다. 호쾌함은 사라지고 굽신거림과 갑질만 남았다.

◆참여, 자율, 창의라는 새로운 덕목

참여정부에 이르러 정부는 권위주의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참여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유가 확대되면서 일방적인 통제나 동원이 어렵게 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과제다. 참여는 자율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율은 아래로부터의 질서다. 중세의 도덕은 선과 악을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짐이 곧 법이다' 이후 더 이상 하늘로부터 법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법은 지배자가 자신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의 권력은 성직자가 가져갔다. 교리가 개인의 신앙에 앞선다. 이소룡은 무술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라고 정의 내림으로써 무술 계파마다 주장하는 품새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또한 50개가 넘는 도장과 겨루기를 하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자신의 무술의 핵심을 전달해준다는 계약을 함으로써 다양한 무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했다. 무술의 세계에 저마다의 품새가 교류되는 자율의 지평이 열렸다.

자율이 자유방임이 되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개인 또는 소수가 내놓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주변으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면 그것을 창의라고 부른다. 창의야말로 아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창의는 개인이 그가 속한 공동체의 기존의 질서를 이해하고 동시에 그 공동체 구성원의 새로운 욕구를 눈치챌 때 가능한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품는 것이다. 동학의 가르침으로 말하면 인내천(人乃天)이다. 문제는 창의가 늘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거·시위·축제는 일종의 참여 놀이
흥과 몰입 유발 창의적 해결책 모색
견딜만한 일은 포용, 지나치면 나서야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은 놀이다. 붉은 악마가 되는 길은 간단하다. 붉은 악마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거나 북소리에 맞춰 대한민국을 외치고 태극기를 몸에 두르거나 태극문양의 페이스페인팅을 하면 된다. 놀이는 규칙이 있다. 규칙이 단순할수록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는 대통령선거나 총선도 일종의 놀이다.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고안된 놀이다. 예배나 시위나 축제 등 참여가 미덕이 되는 일이라면 놀이의 관점에서 디자인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곳은 창의가 발휘되는 공간이 된다.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공간은 엄숙과 집중을 강요한다. 반면 놀이는 흥과 몰입을 유발한다. 놀이는 몸이 하는 일이다. 민주사회에서의 최선은 다중의 공감이 그 바탕이 된다. 나의 몸이 흔쾌하게 반응하는 곳에 참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의 콘서트는 민주사회에 귀감이 된다. 그들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작은 규칙을 만들어내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가수의 퍼포먼스에 떼창과 환호로 참여한다. 가수는 팬의 공감을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다. 콘서트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는 장이지만 팬들의 놀이터에 초청된 광대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가수는 팬덤의 문화기호를 대변하는 대의원이 된다. 팬덤이 가수를 선택하고 그를 인큐베이팅한다. 아미가 키운 BTS가 그렇다. BTS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세계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노사모에서 시작된 팬덤현상은 개딸에 이르러 대중예술의 팬덤문화를 그대로 받았다. 엔터테인먼트가 정치문화를 이끄는 모양새다.

◆도덕은 정도의 문제이며 몸이 그 기준이다

몸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선이 아니다. 그래서 박애가 아니라 이웃사랑이다. 이것이 성서의 복음서가 말하는 율법을 대체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율법이 이데올로기라면 이웃사랑은 일상을 위한 매뉴얼이다.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굶주림에 직면했을 때 주변 부족을 약탈해서 산 것은 신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그 불안정한 삶은 늘 비상사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농경이 가능한 곳에서의 삶은 다른 도덕률이 필요했다. 최소한 이삭줍기라도 할 수 있는 사회는 나눔의 원리가 곧 도덕률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 곧 몸이 도덕률의 기준이다.

신학대학을 다닐 때도 늘 연극동아리 활동에 빠져 있었다. 교회사 시간에 교수님이 내가 하고 있는 공연의 제목을 칠판에 썼다. '전율의 잔'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신학자 본 회퍼의 삶을 다룬 연극이다. 이어지는 분석. "이게 서구인들의 윤리의식이다. 늘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니 전율을 하는 거다. 중세의 이분법 윤리다. 우리나라 민중의 윤리는 '정도'의 문제다." 그랬다. 마을에는 늘 천덕꾸러기, 망나니들이 있었고, 정신병자나 장애자에게 관대했다. 견딜 만한 일이면 포용하는 도덕률이 있었다. 친구 사이에서 장난을 치거나 화를 낼 만한 일이 있어도 '열받게' 하지 않으면 된다. 몸이 견딜 만하면 포용한다. 지금은 욕망의 시대며 개인주의의 시대다.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저마다의 욕망과 붙어있다. 모든 일에 송사를 걸면 자신의 일상이 파괴된다. 정치에 참여하는 일도 그렇다. 사사건건 분노하는 사람은 일상을 돌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역으로 두고 보기에는 너무하다 생각되면 태극기건 촛불이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표출해야 한다. 아니면 일상의 몸짓에 활기가 사라진다. 그리고 참여가 없는 세상은 창의적인 길은 없고 법만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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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 (마임이스트)

내가 속한 교단의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이 글을 쓴다. 모든 일에 법을 말한다. 그렇게 법치를 실현해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전망도 콘텐츠도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아직도 법전문가들 손에 세상일을 맡기고 있다. 내 몸이 견딜 만한지 주의 깊게 살피자. 그것이 나의 일상도 우리 사회도 살리는 길이다. 살피는 일에 진보는 너무 예민하고, 보수는 너무 둔하다. 풍요의 시대에 몸이 좋아하는 것과 몸에 좋은 것 사이에서 견딜 만한 정치와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서 보다 섬세해야 한다.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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