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별다방 커피는 청춘들에게 양보할게요

  • 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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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06 08:26  |  수정 2024-03-06 15:45  |  발행일 2024-03-06 제19면

이향숙
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15년이라는 경력단절을 끊어내고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서 스트레스로 이명을 얻었다. 그만두고 싶었던 차에 대학원 핑계까지 업었다.

평일 하루, 저녁까지 몰려 있는 수업을 듣기 위해 울산에서 대구로 고속도로를 달려야 했다. 한여름을 능가하는 6월 초 기온을 탓하며 울산을 벗어나기 전 별다방(스타벅스)으로 향했다.

커피숍 앞 인도에는 모금 활동 단체가 며칠째 점령하고 있었다. 모금 활동에 애쓰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도로의 뜨거운 열기에 타고 있었다.

보드판을 가리키며 스티커 하나만 붙여달라고 붙드는 청년을 뿌리치며, 테이크아웃을 위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만원이었지만 거절로 불편해진 마음은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공기를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 주문으로 붐비는 계산대 앞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잔 주세요"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주문 오류를 번복하기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치가 여간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인도를 서성이는 그들에게 "땀 좀 식히세요"라는 말과 함께 커피 두 잔을 어쭙잖게 건넸다. 거절당함에 익숙한 그들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데 혼자 불편함을 느끼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도 목표가 있었을 텐데. 별다방 커피 석 잔을 줄이면 한 달 기부금을 낼 수 있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떠나는 발걸음이 상쾌하지 못했다. 더위에 지친 청년들은 시원해진 커피를 입으로 바삐 가져갔다. 운전대를 잡고 보니 시원한 생수도 한 병 주고 올 걸 하는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스페인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인간관계와 처세술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진 현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지침 중 '오지랖 부리지 않는 법'에서는 남을 돕는데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도리어 그 때문에 고민의 씨앗을 자신이 품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럼에도 다음 날, 또 커피를 주면서 남겨진 불편한 마음을 한 번 더 걷어냈다. 수입이 늘면 꼭 기부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당분간 "별다방 커피는 청춘들에게 양보할게요"라는 싱거운 소리를 하고 돌아왔다.

2년 뒤 동대구역에서 그 기부단체를 마주했고,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청년들의 애원을 허락한 사람으로 5년째 살고 있다.

이향숙<(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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