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이번에 내리실 역은 동대구, 동대구역입니다"

  • 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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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03 08:19  |  수정 2024-04-03 08:20  |  발행일 2024-04-03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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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아침 8시30분.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뛰었다. 땀으로 눅눅해진 재킷과 운동화의 쿰쿰한 냄새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의 시간 30분 전 도착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숨소리는 이른 아침 지방에서 상경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한국기술사회가 주최한 CPD(Continuous Professional Development) 강의는 그동안 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강의였다. 지방 강사가 서울 진출이라는 부담감도 보태졌다. 강의실에는 전문가 포스를 풍기는 연륜이 가득한 기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강사로서 주도권 확보는 기본이다. 그날은 유튜브 생중계와 현장 강의 컬래버까지 진행되었다. 카메라 앵글을 벗어날 수 없었던 4시간의 강의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서둘러 강의장을 빠져나와 1층 로비에 다다르자 세찬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 소나기를 당할 재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편의점에서 구매한 우산을 펼쳤다. 비는 더욱 거세졌다. 상경을 환영하는 신고식은 생각보다 화끈했고, 누가 봐도 빠지는 모양새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서울역 계단은 비둘기들의 낙원이었다. 김밥 한 줄과 생수 한 병은 최고의 만찬이다. 비가 그친 하늘의 무지개와 13번 레인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저 멀리 힘겹게 계단을 내려오는 임산부의 모습이 보였다. 갓 두 돌 되어 보이는 아기를 안고, 캐리어를 힘겹게 밀며 기차와 거리를 좁혀 왔다. 뒤따라오는 청년이 도와주기를 바라며 계속 주시했다. 그런데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임산부를 비켜 새치기로 탑승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나쁜!!' 새어 나오는 비난보다 몸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캐리어는 무거웠다. 임산부는 고맙다는 말 대신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만삭의 배를 보며 "순산하세요"라고 덧붙이며 미소를 보냈다.

기차 안은 더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던 찰나 가까이 앉아 있던 임산부와 눈이 마주쳤다. 더위에 지친 아기는 낯선 시선을 피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급히 먹은 김밥에 체했는지, 여태 별일 없었던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동대구, 동대구역입니다" 멘트에 따라 서둘러 통로로 나왔다. 임산부도 아기와 캐리어를 챙기며 일어섰다. 불편한 속을 애써 누르고, 캐리어와 아기를 챙겼다. 마음은 개운했으나 속은 게워낼 정도로 불편했다. 지난날 아픈 배를 쓸어 주던 할머니의 약손이 너무 그리운 날이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구수한 숭늉 한 모금이면 씻은 듯 나을 텐데.

이향숙〈(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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