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유년의 봄

  • 서정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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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02 07:45  |  수정 2024-05-02 07:48  |  발행일 2024-05-02 제16면

서정길_수필가
서정길 (수필가)

내 어릴 적 봄은 두엄 냄새를 앞세우고 왔다. 보리가 파릇하게 자라는 밭에도, 여기저기 파놓은 호박 구덩이에도 역겨운 인분 냄새가 코를 막게 했다. 그럼에도 싫지 않은 까닭은 거름 냄새 뒤에 오는 향긋한 내음의 쑥과 냉이가 연둣빛으로 돋아나고 곧 이모가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겨우내 언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잎을 틔우는 생명의 신비함이 아닐까. 또 다른 이유는 풀과 나무에서 뿜어내는 그윽하고 풋풋한 향기와 무채색 대지를 유채색으로 바꾸는 색채의 향연일 것이다.

하지만 유년의 봄날이 유난히 빛나고 선명하게 각인된 건 이모가 오기 때문이다. 일손이 바빠지는 봄이 오면 며칠 묵다가 갔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이모는 동화책에 나오는 선녀처럼 예뻤다. 뽀얀 피부에 꽃무늬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여태껏 이모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동네 총각들은 이모가 온 걸 알면 몰려와 우리 집을 기웃거렸다. 저녁이면 휘파람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아버지는 처제 마음에 드는 총각 있으면 소개해 줄 테니 말해 보라고 한다. 그럴 때면 이모는 촌뜨기는 싫다며 얼굴을 붉혔다. 이모가 밭으로 나갈 때면 엄마는 "큰 애 데리고 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곱 살인 나는 이모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엄마의 믿음직한 전령이었다.

이모는 씨감자에서 돋아난 순을 고르느라 바쁘다. 순을 제때 치지 않으면 감자 잎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밭에 들어가면 엄마는 기겁이나 한 듯 밭둑으로 밀쳐냈다. 순을 치는 일이 일 년 농사를 좌우한다며 감자밭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이모에게는 봄꽃처럼 은은한 향기가 났다. 긴 머리는 어깨에 닿아 찰랑거렸다. 유독 몸이 약한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이모와 함께 살고 싶었다. 이모가 떠나던 날 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옥수수 익으면 올게. 그때는 옥수수처럼 키가 많이 커 있어야 해."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덧 6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와 이모가 서 있던 그곳에서 오늘은 내가 각가지 채소를 가꾸고 있다. 눈을 감으면 유년의 봄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일곱 살 손녀가 나를 부르며 밭으로 달려온다. 고사리 같은 손엔 보랏빛 라일락꽃이 들려 있다. 아이가 꽃이고 꽃이 아이의 향기다. 손녀도 나처럼 풋풋하고 향긋한 봄을 기억할까.

지금도 내 기억 속 유년의 봄에는 이모가 자리하듯 훗날 손녀의 기억에도 따뜻한 할아버지로 남아 있으려나.

서정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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