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이제 피로 회복제는 팔지 않겠습니다

  • 서정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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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09 07:44  |  수정 2024-05-09 07:47  |  발행일 2024-05-09 제16면

서정길_수필가
서정길<수필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참석했다. 예전처럼 '부어라 마셔라' 풍조는 여전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수저를 놓자마자 약이며 영양제를 틀어넣기 바빴다. 한 친구는 음주 후에는 영양제로 피로를 푼다면서 나처럼 수술로 허약해진 몸에는 호주산 스콸렌이 '딱'이라며 복용을 권한다.

2년 전, 위암 수술한 후 체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수영으로 다져진 어깨며, 등산으로 단련된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활동량이 조금만 과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피로가 몰려 왔다. 10분만 걸어도 전신이 땀으로 범벅되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심한 날에는 눈이 침침하고 눈두덩이까지 부어올라 외출조차 꺼리는 처지였다.

친구의 스콸렌 효능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뒤로하고 눈 영양제를 복용할까 싶어 약국에 갔다. 약값을 계산하려는데 약사가 나를 찬찬히 보더니 "선생님, 많이 지쳐 보입니다. 이것 드시고 피로 회복하시죠"라며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나는 젊은 약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약사님, 피로 회복하면 큰일 나요"라고 하자 약사는 의아한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궁금하면 회복의 의미를 검색해 보라고 하자 약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로란 말은 지쳐 있는 상태를 말하지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피로나 스트레스는 '해소한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요."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거나 명예를 회복한다"가 적절한 문장이라고 설명하자 혹, 국어를 전공했는지 묻는다. 글쟁이라 답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진화한다. 언어를 담는 그릇이 글이니 당연히 달라지겠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라도 세종대왕께 부끄럽지 않게 사용하는 게 후손의 도리일 것이다.

박카스는 모두가 즐겨 마시는 '피로 해소제'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피로 회복제'라 말한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자 약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피로 회복제는 팔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 쌓였던 피로가 해소된 것 같다.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토 달지 않고 수긍해주니 내가 뿌듯하다.서정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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