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연가시

  • 서정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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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30  |  수정 2024-05-30 07:39  |  발행일 2024-05-30 제16면

[문화산책] 연가시
서정길 (수필가)

잡초가 무성한 화단을 정리한다. 바쁜 중에도 화초를 가꾸는 시간만큼은 잡념을 떨쳐 낼 수 있어 좋다. 화단 모서리에 놓아둔 작은 물통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가까이 가보니 흉측하게 생긴 애벌레 떼가 우글거린다. 영화 '연가시'가 떠올랐다.

연가시는 보기만 해도 얼굴이 일그러진다. 갈색 몸은 녹슨 철사를 아무렇게나 구부려 놓은 것 같다. 유충은 주로 사마귀 같은 곤충의 몸속에서 기생한다. 숙주의 배 속에서 날름날름 먹이를 가로채 성장한 후 세상으로 나오는 방법 또한 놀랍고 교묘하다. 곤충이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들게 조종한 다음 그 몸을 뚫고 나온다니 참으로 기괴한 연가시의 성장 과정이다. 마치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세상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건장한 남자 둘이 골프를 친다. 형제가 벌이는 일전으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게임이라 했다. 이유인즉슨 경기에 지는 사람이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나. 우스갯소리라고 하기조차 민망하고 씁쓸한 이야기다. 나 편하자고 낳고 길러 준 부모마저 팽개치려 하다니.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닌가. 어디 이들뿐이랴. 어쩌면 너나 할 것 없이 마음 안에 연가시 한 마리씩 키우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다.

한 친구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이란 신화를 썼지만,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을 접어야 했다. 사업 실패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더 충격이 컸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뒤엎고 싶다고 했다. 원망이 분노로 변했다. 벼랑 끝에 선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지방선거에 멋모르고 뛰어든 적이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유지했고 상대와의 격차도 갈수록 벌어졌다. 선거캠프는 연일 지지자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선거 브로커였다. 고급 정보를 미끼로 흥정을 해왔다. 호형호제하던 선배까지도 그런 부류였다. 돈 앞에서는 연가시로 돌변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허탈과 분노가 쓰나미 되어 나를 덮쳤다.

수척해진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선배가 산행을 제의했다. 그를 따라 지리산에 올랐고 절에서 큰스님을 뵙게 되었다. 연가시가 된 내 마음을 읽었을까.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상대를 향한 미움과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피폐하게 할 뿐이라며 조고각하(照考脚下)의 마음으로 비움과 관용의 삶을 살라고 하셨다.

물통을 깨끗이 청소했다. 화단을 가꾸듯, 내 마음에도 '연가시'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자주 돌아볼 일이다.

서정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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