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 팬텀 전투기와 매릴린 먼로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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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6-14  |  수정 2024-06-14 07:03  |  발행일 2024-06-14 제26면
대구경북 하늘 누볐던 F-4
'동촌' 시절 방문했던 명배우
K2공항 역사 상징적 조각들
이전 이후 개발될 후적지에
작은 추억공간 남겨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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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훈 문화부 차장

지난 7일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 5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영공을 수호한 F-4팬텀 전투기의 퇴역식을 지켜봤다. 1969년부터 2024년까지 반세기 넘는 기간 현역으로 활동한 기체였고, 한때 동북아시아 최강 전투기로서 대구의 공군기지에도 배치된 적 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팬텀기와 얽힌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1980년대 초중반 당시 살았던 대구 동구 신암동의 주택 옥상에서 팔공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팬텀기의 웅장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전투기가 이륙하는 소음 때문에 짜증스러웠다기보다는 지축을 울리는 엔진을 품은 팬텀기의 위용에 감탄하곤 했다.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했던 전투기 애니메이션 '에이리어 88'에서 주인공 '카자마 신'의 기체가 아닌 팬텀기에 더 관심을 두었던 기억도 있다.

팬텀기와 관련된 추억은 대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경북대와 영남대 등 지역 대학에서 엄청난 소음으로 수업이 잠시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팬텀기의 엔진음이었다. 강의실까지 들이닥친 팬텀기의 엔진음이 잦아들 때까지 수십 초 동안 교수님은 창밖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강의를 멈추시곤 했다. 한때 '하늘의 왕자'로 군림했던 팬텀기는 명예로운 퇴역에 성공했지만, 영원히 떠나보낸 것은 아니다. 비록 낡은 모습이지만 상당수 퇴역 팬텀기가 유치곤장군호국기념관과 군위군청 등 지역 곳곳에 전시돼 옛 영광을 기리고 있다.

한편, 팬텀기의 퇴역식을 보면서 해당 전투기의 주 활동무대였던 대구와 관련한 단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2030년 대구경북신공항이 개항하면 팬텀기가 뜨고 내렸던 대구국제공항 및 관련 시설들은 군위·의성군으로 자리를 옮기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수많은 항공기가 이착륙하던 활주로는 대구 도심 외곽으로 떠나가고 그 터는 개발될 예정이지만, 비행장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은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련한 추억의 조각 하나 남지 않은 도시의 풍경만큼 삭막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1954년 동촌비행장(현 대구국제공항)을 방문한 세계적 배우 매릴린 먼로가 떠올랐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당시 대구를 방문한 매릴린 먼로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진 속 매릴린 먼로는 동촌비행장에 주기된 F-86세이버 전투기 옆에 올라서서 손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한때 세계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배우의 뒤편으로는 팔공산이 자리해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스타 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신혼여행을 위해 일본을 찾았던 매릴린 먼로는 위문 공연을 간곡히 부탁한 미군 당국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국행을 결정한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당시 매릴린 먼로가 사진을 찍은 자리에 퇴역한 한국공군의 F-86세이버 전투기를 전시하고 그 옆에 매릴린 먼로 관련 기념물을 설치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만약 이러한 상상이 현실화된다면 대구시민은 물론 외국인들이 찾는 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기대감도 있다. 당연히 동촌비행장의 터줏대감이었던 F-4 팬텀 전투기와 더불어 영공방위에 힘쓴 대한민국 공군의 흔적 일부도 공항이전 후적지에 어떤 식으로든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대구는 대규모 주택사업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마저 바꾸며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한때 이 도시가 이러했다'는 증거 정도는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임훈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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