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그는 평생 독서광이었다. <삼성그룹 제공> |
◆메모로 하루일과 시작
세간에 일부 알려진 대로 이병철은 메모광이다. 그는 살아 생전에 어떤 사업을 하든지 떠오른 구상이나 전문가의 조언, 해야 할 일 등을 언제나 메모로 정리했다. 그 메모 습관이 시작된 것이 바로 제일모직 건설 때부터였다. 당시 조선일보 선우휘 주필과의 1984년도 인터뷰를 본다. "제가 기상이 여섯시 전후입니다. 꼭 같은 시간에 일어나죠. 시계같이 화요일엔 글씨 쓰고 수·금·일요일에는 꼭 골프를 치지요. 일어나서 제일 먼저 목욕을 하지요. 목욕을 하고 정신이 깨끗해지면 그날 할 일을 메모를 합니다. 열다섯가지, 열여섯가지가 저절로 생각납니다. 어제 메모했던 것을 찾아와서 대조하여 보충을 합니다."
즉 큰 틀을 그리고 작은 일은 메모를 통해 실천해나갔던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우석 소장은 이병철의 메모를 이렇게 증언했다. "선대 회장의 메모수첩에는 그날 챙겨야 할 일, 미결 과제, 알아봐야 할 일, 재확인해야 할 일, 만날 사람과의 약속, 점심식사를 같이 할 사람, 전화해야 할 곳, 방문할 곳, 구입할 물건, 상을 줄 사람, 벌을 줄 사람, 구입할 책의 제목,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본 자료 요약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른아침 사업구상·미결과제 등 기록
출근 후엔 메모 펴놓고 하루 일과 진행
시간 분초로 나눠쓰며 정확한 일처리
그의 메모 경영 삼성 매뉴얼로 정착
사업성 검토·기술도입 점검에 적용
치밀하고 세세한 지침 성장 원동력
이병철은 그런 메모를 토대로 삼성 본관 28층 집무실에 출근하면 준비된 메모를 펴놓고 그날의 일과를 진행해나갔다. 전경련 부회장을 지냈던 손병두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은 '손군 20분'이라고 메모에 적어 놓았으면 반드시 20분만 면담을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병철은 정확하게 일했으며 메모를 통해 시간을 분초로 나눠 아껴 썼다. 그리고 퇴근 무렵엔 메모의 내용 중에 실천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수첩에 옮겨써서 집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병철의 메모 정신은 오늘날에는 삼성의 경영 매뉴얼로 완전히 정착했다. 삼성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때 점검하는 '90항목의 사업성 검토'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직원들과 회의하는 이병철. 이병철은 메모가 습관이었다. <삼성그룹 제공> |
1950년 도쿄에서 이병철과 이건희 등 그의 3남. <삼성그룹 제공> |
◆90항목의 사업성 검토
그가 제시한 사업성 검토 지침은 대략 대항목 20개와 소항목 90개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4가지로 압축할 수있다. 첫 번째는 사업성 검토 지침, 두 번째는 환경분석, 세 번째는 자금 소요 규모 및 조달, 네 번째는 시너지 효과 등이다. 먼저 사업의 내용 검토를 보면 새로 벌이는 사업이 삼성의 경영이념과 합치하고 있는가, 기업의 목적과도 부합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기존의 제품보다 품질 향상의 효과가 있는가, 또 제품이 생산되고 난 후 가격인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국민경제에는 기여할 수 있는가 등의 소항목으로 구분돼 점검된다. 또한 기존의 시장규모와 향후 시장규모전망이 검토되고, 대기업으로서 과연 이러한 사업을 해야 하는지의 적합성도 검토된다.
두 번째는 환경분석이다. 여기에서는 과거 10년 전부터 향후 10년에 걸친 국내외 수급실적 및 전망 등이 집중 검토된다. 현재의 경기, 투자동향, 기호의 변화, 대체상품의 동향 등 제반 요인들이 구체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평가된다. 또 경쟁사와 자사의 제품비교를 통한 강점과 약점, 시장의 특성과 구조파악, 요소기술의 개발 및 도입 가능성 등 기술적 요인 분석도 검토의 대상으로 그에 따른 분석보고서가 작성된다.
세 번째는 투자에 따른 자금소요 규모 및 그의 조달이다. 말하자면 설비구매는 최적의 염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용수의 공급이나 전력의 조달, 항만이나 거점 도시로부터의 소요시간 등 입지조건이 검토된다. 또 원료공급의 안정적 확보 여부와 유사시의 공급선 다변화, 작업자의 안전성, 폐수처리, 공해문제 및 작업환경 요인 등이 검토되고, 여기에 다시 시장점유계획과 판촉, 수출대상국의 수입 및 산업정책, 핵심인력의 확보 가능성과 경영자의 확보 여부도 판단해야 한다.
네 번째는 시너지 효과의 문제, 즉 기존에 추진 중인 사업과 수평·수직적인 결합성을 고려해서 생산·기술·판매·조직·인력·활용 면에서의 시너지 효과가 있는가가 검토된다. 또 공정 거래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각종 인허가 시 문제는 없는지도 검토된다. 이어 외국회사와의 합작이나 사업을 신규로 인수할 경우에는 그 대상회사의 현황과 경영상태가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조사분석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가서 신규 사업에 대한 최종점검을 한다.
그것을 보면 ①스스로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서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경쟁관계에 대해 세밀히 검토한다. ②사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대로 따른다. 오늘날에도 삼성은 담당자의 권한이 사장보다 더 셀 때가 많고 사원들의 중지가 곧 회사의 견해로 채택되기도 한다. 이는 이병철 회장 시대 때부터의 오랜 전통이다. 이병철은 '중지수렴이 곧 합리판단'이라고 생각했다.이는 이병철의 중요한 경영철학 중의 하나다. 이병철이 중지를 모아 판단하게 된 것은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다양화되면서 기술이 혁신되지 않으면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는 추세를 보고 내린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 이병철은 평소에 결단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결단이라는 말은 회장 자신의 독단적인 결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즉 그는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사업의 돌파구를 찾기보다는 충분한 조사를 거치고 여러 사람의 의견과 지혜를 모아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도 모르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온다는 말처럼 이병철은 실무를 담당하는 현장 전문가들과의 충분한 토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했던 것이다.
③100%의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사업을 추진할 때 이병철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착수하는 용기와 물러서는 용기였다. 사업을 추진할 때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듯한 검토와 검토를 계속하지만 일단 사업 계획이 확정되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이 이병철의 생각이었다. 이병철은 늘 그렇게 말해왔다. 어떤 사업이든 위험은 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느낄 때는 무언가 문제점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고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백퍼센트의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불안감이 있으면 전력투구를 못하게 됩니다. 배수진을 치고 백척간두에서 단호히 결행해도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히는데 하물며 출발부터 의심하고 망설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입니다." 삼성은 초창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 외국의 선진기업이나 기술보유회사와 손을 잡아왔다. 그 경우 삼성의 사원들이 검토해야 할 매뉴얼이 이병철 시대에 이미 만들어졌다. 이른바 '기술도입의 4원칙'이 그것이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
이병철은 1981년 일본의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의 회견에서 그 내용의 일부를 밝힌 바 있다. 그때의 인터뷰 내용의 핵심은 한마디로 '기술은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보다 중요한 기술이라 하더라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을 보면 ①최고경영자는 솔선수범해서 적극적으로 기술을 도입하되 그것을 효율적으로 살려야 한다. ②도입의 거점을 도쿄에 두고 세계특허 등 고급자료를 입수해서 활용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③삼성 내부의 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기존의 연구단체인 카이스트 등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④무조건 저자세로 도입하려 들지 말고 왜 그 기술에 접근하려는가 하는 목적을 명확히 해서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세세한 지침은 오늘날 삼성을 만든 원동력 중 하나다. 이병철이 초기에 삼성의 계열사들을 하나씩 세워나가면서 썼던 메모는 훗날 삼성의 매뉴얼로 자리 잡아 전사원이 참고하고 검토해야 할 하나의 경영교과서가 된 것이다. 이런 좁쌀보다 더 치밀한 과정을 거쳐 이병철은 글로벌 대기업 삼성을 탄생시켰다.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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