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영화 '써니2'를 기다리며

  •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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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0-24  |  수정 2024-10-24 07:04  |  발행일 2024-10-24 제22면

마준영기자〈경북부〉
마준영기자〈경북부〉

2011년 745만명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한국 영화 '써니'에서 나미는 죽음을 앞둔 춘화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옛 써니의 멤버들을 하나둘씩 찾아 나선다. 써니의 칠공주는 모두 나미처럼 여유로운 삶이 아니다. 쌍꺼풀에 집착하던 장미는 보험설계사로 실적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문학소녀의 꿈을 버린 지 오래인 금옥은 시어머니를 부양하며 궁핍하게 산다. 복희는 미스코리아가 됐지만 미용실이 망해 접대부로 변두리 술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왔다. 춘화의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에게 변호사가 춘화의 선물이 담긴 유언장을 읽어주고, 친구들이 춘화의 영정 사진 앞에서 보니 엠의 'Sunny'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영화 써니의 마지막 장면이 13년이 지나 현실에서 재현됐다. 지난 16일 오후 대구 달서구 한 장례식장. 경북 칠곡군의 할매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 멤버 중 한 명인 서무석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졌다. 수니와 칠공주는 여든이 넘어 한글을 깨친 칠곡군 할머니 8명으로 구성된 힙합 그룹이다. 평균연령 85세, 최고령자 정두이 할머니는 92세다. 그룹 창단 이후 국내외 각지로 공연 다니고, 방송 출연과 광고를 찍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세계 주요 외신으로부터 'K-할매'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서무석 할머니는 지난 1월 림프종 혈액암 3기로 3개월 이상 생존하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고도 타인에게 알리지 않고 모든 활동에 참여했다. 10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글주간 개막식'에서 비보이팀 엠비크루와의 합동공연에도 빠지지 않았다. 의사의 예상보다 6개월을 더 살며, 멤버들과 천국 같은 1년을 함께 보내고 떠났다. 가장 절친인 이필선 할머니가 준비해 온 편지를 읽어내려가자 멤버들은 참아왔던 울음을 왈칵 쏟아냈다. 노트에 한 자 한 자 직접 편지를 써온 이 할머니는 침침한 눈으로 친구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아프단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그렇게 가버리니 좋더나. 하늘나라에 가서 아프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랩을 많이 부르고 있거라. 벌써 보고 싶다." 영정사진 속 환히 웃는 서 할머니의 복장과 똑같이 맞춰 입고 온 멤버들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단체 안무와 함께 랩 공연을 펼쳤다. 유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수니와 칠공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서 할머니와의 마지막 완전체 공연이었다. 할머니들의 랩은 우리 어머니 세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수니와 칠공주를 소재로 써니2를 제작하면 어떨까.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눈물이 뜨겁게 흐르고 웃음이 빵빵하게 터지는 등 영화로서 갖춰야 할 극적인 요소가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써니를 제작한 강형철 감독에게 제안해 본다.마준영기자〈경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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