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한강의 어휘력

  •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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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0-29  |  수정 2024-10-29 07:03  |  발행일 2024-10-29 제23면

"동식은 도로 맞은 편의 건물들 사이로 사위어가는 황혼을 보고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 '붉은 닻'의 첫 문장이다. 일반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사위어가는'이란 단어를 쓰면서 시작했다. '사위어가는'은 '불이 다 타고 사그라져 재가 되다'라는 뜻을 가진 '사그러지다'의 형용사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강의 또 다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도 익숙하지 않은 형용사 '성근'으로 시작한다. '성근'은 물건의 사이가 뜨다라는 뜻도 있고, 관계가 깊지 않고 서먹하다는 의미도 있다. 소설에서는 물건의 사이가 뜨다는 뜻이다.

한강은 아름답고 쓸쓸한 느낌의 형용사를 사용해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그걸 볼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그런 표현이 또 있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소슬한'은 으스스하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소설 '흰'에는 '물큰하게'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물큰하게'의 사전적 의미는 '갑자기 심하게 풍기는 느낌이 있다' 는 뜻의 형용사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드러운 느낌이 날 정도로 물렁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우리 말 형용사는 다양한 표현이 워낙 많아 외국어로 번역할 때 한국 사람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번역가의 공로도 있었다. '사위어가는' '성근'을 아무리 멋지게 영어로 번역해도, 한국 사람이 이들 형용사에서 느끼는 정서까지 담지는 못했을 것 같다.

김진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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