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채소 트럭 할아버지 2

  • 이근자
  • |
  • 입력 2025-08-04 06:00  |  발행일 2025-08-03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내게 할아버지라는 의미는 단순히 나이만 많은 게 아니다. 몸짓이나 말본새 그리고 말의 내용까지 할아버지다워야 했다. 그러니까 소방도로에서 채소를 파는 트럭의 주인인 아저씨가 꽤나 현명해 보이고 본받고 싶은 면도 있어 보여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아마 그가 누구에게든지 슬며시 반말을 하는 것도 나이 들어 보이는 원인의 하나인데, 내 짐작에 본인이 의도한 것 같았다.


그는 몸집이 있고 얼굴과 눈코가 커서인지 키가 작아도 후덕해 보였다. 빠릿빠릿하지도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느리고 나직한 반말로 손님에게 요점만 전하는 말투는 또 어떤가. 문장의 주어도 동사도 이야기의 논리적인 과정도 자주 빼먹었지만 꼭 오빠처럼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여동생에게 안기듯이 투정하는 말투로. 오늘은 뭐가 너무 비쌌다거나 토마토는 맛이 없으니 꼭 끓여 먹으라는 등.


그의 트럭 가게는 소방도로 코너에 세워져 있다. 트럭에서는 과일 두세 종류를 팔고 건너편 인도 바닥에는 채소 상자 예닐곱 개를 죽 늘여놓았다. 대로변의 상가 어느 곳보다 큰 가게인 셈이다.


그렇게 전을 펼친 후에는 간이의자를 트럭 그늘에 내놓고 거기 푹 파묻혀 앉아 있었다. 그런 그가 채소전인 도로 건너편으로 넘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손님이 기다리고 섰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의자에서 끙하는 입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도로를 건너오는데, 손님 입장에서는 어기적거리며 걷는 그 모습을 한 번 보고 난 후에는 다시 그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손님은 제가 살 것을 직접 비닐봉지에 담은 후에 길을 건너 트럭 주인 앞에 검사를 받듯이 내밀고는 돈까지 바치는 것이다.


이런 일이 크게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친근한 말투도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늦봄이면 낯선 이가 채소 상자 앞에 오디를 내놓고 팔았고, 물건은 계절에 따라 복분자나 사과로 바뀌었었다. 어쩌다 물건의 주인이 급한 볼일로 자리를 비울라치면 그가 대신 물건을 팔아주는데, 이때 길을 건너와 직접 봉지에 담아주는 것이다. 맛있다고 호객까지 하면서.


그리고 트럭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가게 주인 대신에 물건을 담아주고 돈도 대신 받는 할머니나 아저씨들이 있다. 그곳에서 동네의 온갖 소식이 술렁거렸다.


트럭 사랑방 주인인 그가 풍기는 느리고 의뭉스러운 그 분위기가 참 정겨운데, 그럴 때는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내면의 나이가 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진짜 할아버지라고 말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