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만든 열악한 노동현장…반세기 지난 지금도 곳곳에”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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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05 16:14  |  수정 2025-08-07 10:23  |  발행일 2025-08-07
오빠 일기 보면 ‘다 바친 저를 긍휼히…’ 유서 같은 글귀
전태일 정신 아래 하루도 쉴 틈 없이 소통하는 삶 만족해
SPC·포스코이앤씨 등 사망 사고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
대구시민 큰 돈 모아 옛집 보존…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워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전순옥 관장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오빠 전태일의 동상 옆에 나란히 섰다.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오빠 전태일의 동상 옆에 나란히 섰다.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오빠 전태일의 동상 옆에 나란히 앉았다.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오빠 전태일의 동상 옆에 나란히 앉았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취임후 가장 먼저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역을 참배했다. 현직 노동부 장관으로 첫 공식 참관이다. 김 장관이 열일 제쳐두고 찾은 전태일(1948~1970)은 대구 출신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견인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근무했으며,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1970년 11월 13일 스스로의 몸에 불을 당겼다.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은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오빠 전태일이 염원하던 노동자 근로환경 개선의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본다. SPC, 포스코이엠씨 등의 안타까운 사고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행복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부산에는 해군이 쓴 모자가 시장에 유통됐어요. 아버지는 그걸 모두 사들여서 뜯고 염색을 해 옷을 만들었어요.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걸 국제시장에 내다 팔았구요. 그 때 돈을 꽤 많이 벌었어요."


당시 세간에는 '미군부대서 나오는 모자는 전상수가 다 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업이 융성했고, 매일 마대자루에 돈을 쓸어 담았다. 하지만 좋은 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장마로 염색한 천들이 못쓰게 되었다. 급기야 서울로 이사하고, 공장을 설립해 재기를 노렸지만 419가 터지면서 판매대금 회수를 못해 큰 타격을 입었다. 장남 전태일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평화시장 '시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오빠는 자신의 운명 알았을 것"


갑자기 말을 멈춘 전 관장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오빠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날 오빠가 집을 나서던 때가 떠올라요. 그때 야간 중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선생님이 저를 일으켜 세우고 월사금 150원을 가져오라고 채근하셨지요. 집을 나서는 오빠를 붙잡고, 월사금을 언제 줄거냐고 물었죠. 그때 오빠는 힘없이 웃으며 며칠만 기다리면 오빠가 다 해결해줄게 라고 했어요. 그 말에 신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에 오빠는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전 관장은 오빠 전태일이 집을 나서던 그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여, 그런 오빠에게 철없이 월사금을 달라고 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즈음 쓴 오빠의 일기를 보면 '나는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내가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저를 다 바친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라는 유서같은 글귀가 있어요. 오빠는 그 글을 써놓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거죠"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대구시절을 회상하며 포즈를 취했다.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대구시절을 회상하며 포즈를 취했다.


◇"대구는 가장 행복했던 곳"


2019년 대구에서는 특별한 시민운동이 벌어졌다. 전태일 일가가 살았던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 판잣집이 개발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몇몇 뜻있는 이들이 '전태일의친구들'을 결성하고 보존 운동에 돌입한 것.


당시 3천여명의 시민과 500여개의 단체, 예술인들이 참여해 4억3천여만원을 모았다. 전태일의친구들은 이듬해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기를 맞아 집에 '전태일' 문패를 달았다.


"대구시민들께서 큰 돈을 모아 집을 보존해 준다고 했을 때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대구라는 도시가 진보적이고, 엘리트가 많았음을 다시 상기하게 됐죠. 생전에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에 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 오빠 생각도 나고,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마움을 느낍니다. 대구가 자랑스럽습니다."


전 관장이 기억하는 오빠 전태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빠는 늘 사람을 귀중하게 여겼어요. 자신은 물론 친구와 공장의 여공들까지 모두가 함께 행복하고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팍팍하고, 가슴 아픈 일들만 있었죠.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오빠의 모습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소통하는 삶'이에요."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대구시절을 회상하며 포즈를 취했다.

대구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전태일기념관장이 대구시절을 회상하며 포즈를 취했다.


◇노동자 인권 크게 나아지지 않아


2025년 한국의 노동현장은 얼마나 안전할까. 전태일이 노동자 인권을 소리치며 떠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올해만 해도 SPC, 포스코이앤씨 등 노동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예전에도 산재는 많았지요. 지금처럼 로울러에 빨려 들어가서 죽는게 아니라 그때는 좁은 공간에서 먼지를 먹고 일하다 폐병이 걸리고, 신경통으로 시름했죠. 형태만 다를 뿐 그때나 지금이나 산재는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전태일의 동생'으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사실 전 관장은 노동분야서 오래 활동한 전문가다. 영국에서 노동사회학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했다. 제19대 국회에서는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형태가 생겨나고, 노동악법도 등장할 수 밖에 없을겁니다. 노동시장 종사자 입장에서 보면 1970년대나 지금이나 비슷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현장도 있지요. 어쩌면 그들이 지금, 오늘의 전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순옥 관장이 꾸는 꿈


전 관장은 지난해 11월 취임한 후 하루도 쉴 틈이 없다. 틈만 나면 시민에게 다가설 방법을 강구한다. 건물 외관을 리모델링 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난다.


"전태일의 정신 아래 소통하는 공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건물을 뒤덮고 있던 빽빽한 포스터들을 떼어냈더니 밝은 공간으로 탈바꿈했죠. 세상의 모든 웃는 얼굴을 모아서 건물 한켠을 장식했구요. 이제는 길을 가던 시민들이 건물로 들어와 쉬고, 전태일 동상 곁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립니다. 시민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죠."


사람들은 가끔 전 관장에게 이미 작고한 오빠, 엄마와 함께 일평생 살아가는 삶이 무겁지는 않은지 묻는다.


"오빠의 몇 주기가 되면 가끔 제게 그런 질문을 해요. 하지만 저는 하나도 무겁지 않아요. 오빠는 전태일의 삶을 살았고, 저는 전순옥으로 사는 것이죠. 오빠의 삶을 '소통'으로 요약한다면, 제 삶은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돈, 명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 먹을 거 있으면 됐고, 내 몸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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