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정진경, 사물의 숨

  • 태병은 아트리움 모리 큐레이터
  • |
  • 입력 2025-08-26 06:00  |  발행일 2025-08-25
태병은 아트리움 모리 큐레이터

태병은 아트리움 모리 큐레이터

무심히 지나친 어떤 것들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은 적이 있는가.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 사소하지 않은 남다른 애정을 가져본 적 있는가. 몽땅하게 짧아져버린 연필과 늘어진 줄 이어폰.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수건과 매일같이 손에 들리는 도시락 가방. 작가 정진경의 캔버스는 그런 것들로 채워진다.


단정하게 배치된 화면은 호수의 잠잠한 수면과도 같다. 거듭된 붓질로 덧입힌 색,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시간의 층위들. 평범함은 작가의 손을 통해 시간을 눌러 담은 흔적으로 변한다. 정돈된 평면 아래 축적된 시간들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작가의 캔버스 안에서 사물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 된다. 그것이 감내한 시간과 역할이, 그 익숙함이 나의 무탈한 하루를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잠잠히, 하지만 깊숙이 침잠된 익숙함의 흔적은 무탈한 일상을 떠받친 깊고 은밀한 주인공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관계'라는 말을 떠올리자면, 우리는 당연히 사람 간의 유대를 우선 떠올리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우리는, 사람 간의 관계를 위해 늘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잘 해보고자, 특별해지고자 애원하는 마음이 때로 지나친 피로로 다가오지만 사물에게만큼은 그런 강박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어느새 그것은 나의 일상 속에 무언의 이름으로 자리 잡는다.


정진경의 회화를 통해 우리는 이 관계를 역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은 사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되고, 그 담백한 교감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상기할 수 있다. 사물과 나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시선은 때로 말보다 더 깊게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정진경의 회화 속 사물들을 통해 곱씹는다. 보편적인 것은 정말로 평범한가? 아니면 그 자체로 모두 특별함의 근원인가. 작가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표면적인 언어로 시선을 붙들어 놓음으로써 가시적인 것 너머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감각을 불러온다.


우리는 이토록 작은 것들에 감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작가의 작품은 인스타그램 계정(@jg2_jung)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