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울진 출신으로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중인 남해웅 명창이 서울 강남에서 열린 축제에 오르기 전에 잠시 포즈를 취했다. /김은경 기자

경북 울진 출신으로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중인 남해웅 명창이 서울 강남에서 열린 축제에 오르기 전에 잠시 포즈를 취했다. /김은경 기자
국립창극단 남해웅 명창은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다. 2012년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경북 울진 오지마을에서 태어나 소리와 함께 살아온지 40여년, 어느새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단체의 일원이 됐다. 뿐만 아니다. 20대인 두 아들 역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으며 국악인 가족이 됐다. 남 명창은 "눈을 감으면 어린시절 제사 때 축문을 외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경상도식 메나리조의 노래처럼 들리던 그 소리에 홀연히 빠져 살아온 인생이다. 제 소리의 근원을 찾는다면 아마도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작정 소리가 좋았던 소년…"그게 바로 판소리야"
경북 울진 깊은 산골, 백암온천을 품은 외선미리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어린 남해웅은 매일같이 1시간 넘는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과 남포등에 의지하던 시절이었다. 가을이면 떨어진 밤을 주워 먹으며, 겨울에는 토끼를 잡아 스승께 드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동네를 내려다보면 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들판이 펼쳐져 있었어요. 참 아름다웠죠."
그의 집안은 책과 글을 가까이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문과 사서삼경을 줄줄 외던 아버지는 각종 문서도 직접 써줘 온동네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무엇보다 남해웅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아버지가 글을 읽는 소리였다. 한문을 낭송할 때마다 곡조를 붙여 읊조렸고, 제사 때의 축문은 경상도식 메나리조로 낭랑하게 읊조렸다. 어린 아들은 그 곡조를 자연스레 따라하며 자랐다. "아버지가 책을 읽으실 때 그 소리가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저도 모르게 제 몸에 스며들었죠."
소리의 씨앗은 그렇게 심어졌다. 그는 길을 걸으며, 산에 올라 흥얼거리며 스스로 판소리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초등학교 국어책의 '심청전' 대목을 보고, 배운 적도 없는 판소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성해 불렀다. 중학교 입학 후 담임 교사가 "그게 바로 판소리야"라고 알려주면서 비로소 '판소리'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가 소리를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것과 달리 아버지의 반대는 오히려 커져갔다. "무당짓 한다"며 예인(藝人)의 길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 그럼에도 소리를 향한 욕망은 멈출 수 없었다.
◆조상현 명창과 극적인 만남
고등학교 진학 후 음악 교사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국악고에 갔어야지, 왜 인문계로 왔느냐"는 선생님의 말에 '국립 국악고'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그는 늦었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국악고 교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 전학을 요청했지만,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오정숙 명창에게 손편지를 보내 배움을 요청한다. 몇차례 도전 끝에 국악인 원광호 선생을 소개받아 함께 기거하며 비로소 판소리 첫걸음을 뗐다.
"시장에서 고등어 사다 드리면서 같이 살았어요. 그렇게 처음 판소리를 배웠죠."
꿈을 향해 나섰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정규 국악 교육을 꾸준히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는 고3 무렵, 홀홀단신 서울행을 결심했다. "농사만 지으며 살 수는 없겠다 싶었죠. 소리를 배울 욕심으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우선 숙식이 가능한 간판 제작소에 들어갔지만, 가건물 옥상방은 겨울이면 물이 얼 정도로 열악했다. 그런 중에도 소리에 대한 갈증은 멈추지 않았다. 서울 생활이 고달파질 무렵 우연히 목욕탕에서 단소를 기막히게 부는 세신사와 만난 것이 결정적 전환이 됐다. 그의 안내로 '판소리보존회' 문을 두드렸고, 당시 명성을 날리던 조상현 명창이 활동하던 그곳에서 본격적인 수련의 길이 열렸다.
처음엔 일반반에서 시작했으나 곧 개인 지도로 전환했다. 당시 월급 20만 원 남짓 중 5만 원을 수업료로 내며 지도를 받았다. 이후 여러 선생을 사사(師事)하며 춘향가·심청가를 두루 익혔다. 총무로 활동하며 숙식을 해결했고, 스승에게 "이제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제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전라도 광주까지 흥보가를 배우러 다닐 만큼 학구열이 컸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욕심은 많았어요." 잠시도 쉬지 않고, 배움의 고삐를 조이더니 마침내 전국의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판소리 완창의 세계로 나아갔다. 손편지를 보내고, 신문을 돌려 숙식을 해결하고, 주소도 모른 채 무작정 명창을 찾아 전국에 발품을 헤맸던 시간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판소리 명창과 어릿광대로 나란히 국악인의 길을 걷는 남해웅‧창동(오른쪽) 부자. /김은경 기자
◆국악의 길 선택한 두 아들 "가끔 마음 아파"
오직 소리를 찾아 헤맨지 40여년, 그 사이 아들 두명이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판소리를 하는 첫째 '상동'군은 국립국악원 주최의 큰 대회 입상 후 군 면제를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둘째 '창동'은 어려서부터 '줄타기 신동'으로 유명세를 떨치더니 이제는 전국의 지자체 행사에서 초청콜이 이어지는 등 유명인이 됐다.
"두 아들이 저와 같은 국악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 든든하면서도 가끔 아비로서 마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거든요. 아들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괜히 시켰을까 하는 불안함이 밀려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국악인생이었다. 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소리에 빠져 평생을 소리에 바쳐온 그에게 '소리'로 꿈꾸는 인생 2막이 있는지를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가요를 들으며 위로받고, 열광합니다. 대중음악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우리의 소리는 그 속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물론 슬픔, 기쁨, 자연,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녹아있습니다. 되돌아보면 제가 만족할 만한 소리를 쭉 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제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소리를 위해서 쭉 정진하고 싶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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