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속도로 걷다, 울진] 1. 느림이 빚은 풍경…솔바람과 파도 소리가 머무는 월송정

  • 박관영·윤일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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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29 19:10  |  발행일 2025-10-29
솔잎의 속삭임 파도의 밀어…해송숲에서 잠시 시간을 멈춰본다

느림, 잃어버린 호흡을 되찾는 시간


여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품격이며, 느림은 낭비가 아닌 회복의 시간이다. 서두름을 내려놓는 순간, 시간은 우리 편이 된다. 빠름이 효율을 뜻한다면, 느림은 깊이를 낳는다. 우리는 앞서가기 위해 달리지만, 정작 소중한 것들은 그 달음박질 속에서 쉽게 흩어진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시간은 또 다른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는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 조급한 자는 도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했고, 중국의 시인 도연명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노래했다. 철학자 니체는 "위대한 것은 천천히 자란다"라고 했으며, 문학가 헤세는 "삶의 가장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동서양의 성현들은 한목소리로 "서두르지 말라, 진정한 삶은 느림 속에 있다"라고 충고한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늦추는 행위가 아니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자기만의 호흡과 맥박을 되찾는 일이며, 삶의 템포를 자신에게 맞추는 과정이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살아간다'보다 '버텨낸다'라는 말을 더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비로소 들리고 감각되는 것들이 생긴다. 가을바람에 스치는 솔잎의 속삭임, 파도의 밀어, 저녁놀이 잦아드는 순간의 고요와 적막, 오래된 책장을 넘길 때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숨결, 억눌려 있던 감정과 잊힌 기억은 서두르지 않는 순간 천천히 되살아난다.


걷기는 깨어남의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다. 걷는 사람만이 세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읽으면서 걷고, 걸으면서 사색할 때 예술적 영감과 학문적 통찰은 더 쉽게 다가온다. 철학자 루소는 "오늘도 걷는다. 걷지 않으면 생각도 멈춘다"라고 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시간을 내주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동해의 해송 숲속에 고요히 자리한 월송정은 이처럼 '시간의 속도'를 조절해 주는 공간이다.



푸른 동해와 맞닿은 솔숲을 배경으로 하는 월송정. 고려시대 지어져 조선 중기 중건하고 전쟁과 식민지배 아래 여러 차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월송정은 1980년 다시 태어났다.

푸른 동해와 맞닿은 솔숲을 배경으로 하는 '월송정'. 고려시대 지어져 조선 중기 중건하고 전쟁과 식민지배 아래 여러 차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월송정은 1980년 다시 태어났다.

동해 맞닿은 정자가 치유의 공간

시인과 묵객들 빼어난 경관 찬미

맨발걷고 숲멍·하늘멍하기 좋아

속도의 시대 살고 있는 우리에게

솔숲길은 느림의 미학 잘 구현돼

"삶이 숨가쁘면 천천히 걸어보라

솔바람이 당신에게 속삭이며 위로

소중한 건 언제나 느리게 온다고"

◆솔바람이 짓고 시간이 다듬은 정자


울진의 월송정은 거대한 궁궐이나 화려한 사원이 아니다. 푸른 동해와 맞닿은 솔숲을 배경으로 바람과 달빛이 함께 머무는 평범한 정자일 따름이다. 그러나 단아한 풍경 속에는 한민족의 기억과 지역의 서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고려시대 창건 이후 조선 중기 박원종이 중건하며, 전란과 식민의 격랑 속에서 몇 차례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 해군은 적기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며 월송정을 철거했다. 문화와 풍경이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무참히 짓밟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1964년, 재일교포들이 고향의 그리움을 안고 '금강회'를 결성해 정자를 복원했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의 복원이 아니라, 향수의 귀환이자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1979년 현대식 구조물이 철거되고, 1980년 고려 양식을 본뜬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월송정은 상처와 회복의 역사를 품은 기념물로 남는다.


월송정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 연면적 85.8㎡ 규모의 건축물이다.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양쪽 측면에는 해송 숲이 병풍처럼 정자를 감싼다. 그곳에 앉으면 시간은 '지금'이 아닌 '언제'라는 감각으로 흐른다. 월송정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기억을 잇는 다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월송정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연면적 85.8㎡ 의 공간을 갖고 있다. 월송정은 과거와 현재이라는 시간을 현실과 기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월송정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연면적 85.8㎡ 의 공간을 갖고 있다. 월송정은 과거와 현재이라는 시간을 현실과 기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경계를 넘어 고요에 닿다


많은 사람이 '월송정(月松亭)'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는 '월송정(越松亭)'이다.


일설에 따르면,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에서 옮겨온 소나무를 심었다 해 '월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자 월송정의 월자는 본래 '넘을 월(越)'로, '산을 넘는다(越嶺, 월령)', '국경을 넘는다(越境, 월경)' 등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뜻한다.


일부 학자들은 넘을 월을 쓴 월송정을 "세속을 넘어, 자연과 마음이 만나는 초월의 공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월송정은 '달(月)'의 낭만에다 '넘을 월'의 의미까지 품은 정자라 할 수 있다.


조선 성종은 월송정을 전국의 정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으며 "용흥각의 화려함도 아름답지만, 월송정의 고요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월송정을 '관동팔경'의 하나로 찬미했고, 겸재 정선 또한 이곳의 빼어난 경관을 그림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다. 달빛 아래 변치 않는 소나무처럼, 월송정은 세월을 넘어 흔들림 없는 고요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월송정 솔숲길은 느림의 미학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곳이다. 해송으로 둘러쌓인 황톳길과 나무 데크는 맨발로 걷기에 알맞다.  솔향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불고 흙의 온기가 발바닥으로 느껴진다.

월송정 솔숲길은 느림의 미학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곳이다. 해송으로 둘러쌓인 황톳길과 나무 데크는 맨발로 걷기에 알맞다. 솔향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불고 흙의 온기가 발바닥으로 느껴진다.

◆느림의 미학, 맨발 걷기와 해맞이


현대인은 너무 바쁘다. 모든 일에서 지름길과 직선만을 추구하며,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갠다.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라고 했다. 직선은 자르고 나눈다. 반면 세상의 고귀한 것들은 대부분 곡선이다. 곡선은 여유롭고, 부드럽고, 포용한다.


월송정 솔숲길은 바로 그 곡선과 느림의 미학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길이다. 해송으로 둘러싸인 황톳길과 나무 데크는 맨발 걷기에 적합하다. 솔향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부드러운 흙의 온기가 발바닥을 감싼다. 바다와 숲, 바람과 사람이 한 율동으로 이어지는 순간, 마음은 묘한 해방감과 평화를 얻는다.


1km가 조금 넘는 월송정 솔숲길 맨발 걷기 코스는 25분쯤 소요된다. 쉼터마다 책이 있는데, 책을 펼쳐 사색에 빠지기에도 좋다. 이곳은 멍때리기 장소로도 이름 나있다.

1km가 조금 넘는 월송정 솔숲길 맨발 걷기 코스는 25분쯤 소요된다. 쉼터마다 책이 있는데, 책을 펼쳐 사색에 빠지기에도 좋다. 이곳은 '멍때리기' 장소로도 이름 나있다.

1㎞가 조금 넘는 맨발 걷기 코스는 천천히 걸으면 25분 남짓 걸린다. 꽃무릇과 맥문동이 피는 계절에는 더욱 찬란하고, 사계절 내내 다른 빛깔로 변한다. 쉼터마다 책이 놓여 있어 잠시 앉아 책을 펼치거나 사색에 잠기기에도 좋다. 신라의 화랑들이 이 숲에서 달을 바라보며 뜻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새벽 맨발 걷기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붉게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온몸에 신비한 기운이 스며든다. 이곳은 '멍때리기' 장소로도 유명하다. 숲멍·물멍·하늘멍하며 아무 생각 없이 머무는 순간, 오히려 생각은 더 깊어진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서 중력의 법칙을 깨닫고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을 떠올렸듯, 창조적 깨달음은 대부분 '멍'의 시간 속에서 문득 찾아온다. 월송정의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사유의 문을 여는 열쇠로 작용한다.


월송정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양쪽에는 해송숲이 병풍처럼 정자를 감싼다. 그 주변은 고요하고 자연 친화적인 관광명소가 함께 느림의 여정을 보낸다.

월송정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양쪽에는 해송숲이 병풍처럼 정자를 감싼다. 그 주변은 고요하고 자연 친화적인 관광명소가 함께 느림의 여정을 보낸다.

◆정자 밖, 다른 풍경들


월송정 주변의 고요하고 자연 친화적인 관광 명소들은 느림의 여정을 확장한다. 솔숲이 아름다운 구산해수욕장에는 무지개색 초성 조형물이 설치돼 있으며, 오토캠핑장과 숲속 캠핑존·샤워실과 식수대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에는 관찰대와 전망대가 있어 조류와 해안선, 바다를 관찰하기에 좋다. 또한 평해 황씨 시조단과 해월 황여일 종택도 역사적인 발걸음을 더 해준다.


◆머무름이 씨앗이 되는 순간


누구에게나 마음 한 자락을 오래 붙잡아 두는 장소가 있다. 사랑을 고백한 카페의 창가 구석 자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발자국이 남은 해변, 젊은 날 실의와 좌절의 순간에 늘 홀로 찾던 방죽길, 푸른 피가 솟던 유년의 강가 그 미루나무. 아직 그런 곳이 없다면, 월송정이 당신 생애에 가장 기억에 남을 '처음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월송정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침묵이 언어가 되고, 바람이 시가 된다. 이 고요한 정자에서 사랑의 언약을 맺고, 자녀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 간절한 소망을 바다와 소나무에 새기고 심어보라.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이곳을 찾게 되면, 그때 씨앗들이 솔바람과 파도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가슴 뿌듯한 추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정자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소망의 씨앗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기둥으로 자랐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월송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다. 그 품에 안기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묻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삶이 숨 가쁘고 마음이 메말랐다면 월송정 솔숲길을 천천히 걸어보라. 청량한 솔바람이 태고의 목소리로 당신을 위로하며 나직히 속삭여 줄 것이다. "서두르지 말라,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언제나 느리게 온다."


이 가을이 가기 전 소중한 추억과 상념이 어깨를 맞대는 이 고요한 숲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해 보라. 월송정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글=윤일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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