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앞둔 박정순 할머니가 점자책을 손끝으로 읽으며 시를 외우고 있다.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중략)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구순을 앞둔 할머니는 김동원 시인의 시 '오십천'을 조용히 읊었다. 깊고 온화한 목소리가 낮게 깔린 공기를 밀어내며 깊게 울렸다. 짧은 시편은 할머니의 입에서 '흔들려 뒤척이며 화사한 꽃'을 피워냈다.
박정순 할머니. 올해로 89세인 그는 시낭송가다. 하지만 여느 시낭송가와는 다르다. 그렇게 좋아하는 시를 두 눈으로 읽을 수 없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구점자도서관 3층 시 낭송 강의실에서 만난 박 할머니는 "시를 외우 낭송할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힘들지만 박 할머니는 병원 가는 날 외에는 매주 점자도서관에서 열리는 시 낭송 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10여편의 시가 담긴 점자책을 손 끝으로 읽고 외우는 할머니의 모습은 진지하고 차분하기만 하다. 그렇게 외운 시편들은 할머니의 목소리로 전달되면서 '또 다른 시'가 된다.
박할머니가 처음부터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근시로 칠판 글씨가 안 보여서 짝꿍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2년 전만 해도 형광등 불빛은 희미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그 불빛마저 느낄 수 없다.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박 할머니는 초등학교 졸업 후 여러 지역에 살다가 33살에 대구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하지만 삶은 만만치 않았다. 56세에 남편을 여의고, 힘겹게 살았다. 막내아들과 의지하며 함께 살았지만 코로나19로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지금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작문 시간에 시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66세에 시각장애인이 되어 70세에 들어 점자를 배웠다. 젊은 사람들도 배우기 어려워하는 점자를 늦은 나이에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공부한 끝에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어린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시를 읽고 시 낭송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9월 시 낭송가 서도숙 강사에게 시 낭송을 배워 지금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 공부를 해 오고 있다.
시각장애인 박정순 할머니가 공부하는 시 낭송 점자책.
박 할머니는 "10여 년 동안 시 낭송을 하다 보니 치매 예방도 되는 것 같고, 좋은 시를 많이 외우다 보니 삶에 유익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또 "시를 손끝으로 읽어 내려갈 때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좋고 그러면서 스스로 위안 받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혹시나 치매로 고생하면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시낭송에 더 힘을 쏟는다고도 덧붙였다. 서도숙 강사는 "앞을 볼 수 있어도 매주 한 편의 시를 외워 읊는 것은 힘든데 박 할머니는 한 편의 시를 거뜬히 외우고, 낭송을 잘해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감동이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고 뿌듯하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의 꿈을 담담하게 말했다. "시낭송을 하면서 지나온 삶에 감사함을 느껴요. 기회가 된다면 양로원이나 복지관에서 시 낭송 봉사를 하면서 남은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죽기 전에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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