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안식의 집

  • 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 |
  • 입력 2025-11-26 06:00  |  발행일 2025-11-25
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한 주간의 긴장감을 따끈한 차 한잔에 저어 마시는 저녁이 좋다. 이럴 때 집은 확실한 안식처가 된다. 며칠 전 지역의 조각가 단체와 지방아트페어에 관한 글을 써서 전송했다. 모두 자생력을 찾아가는 지역 작가들과 마주한 시간이다. 그 여운이 '안식의 집'으로 흘러든다.


작년 봄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베니스비엔날레 관람차 나선 길이다. 오페라 관람은 음악 애호가들이 추천한 덤의 선물이었다. 당시 경탄했던 세 가지 장면이 선명하다. 하나는 오페라 무대의 현장감이다. 거침없이 다가오던 무대 위의 기운이 기술로는 흉내낼 수 없는 전율을 일으켰다. 두 번째 감탄은 객석이다. 예술에 대한 존경과 체화된 즐김이 마치 공연의 일부 같았다. 마지막은 주세페 베르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비롯됐다. 베르디의 론콜레 생가에서 '안식의 집(Case Verdi)'으로 가던 길은 또 다른 모습의 순례 여정이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베르디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무명의 악사다. 성공한 후 그 악사에게 한 보답은 베르디의 사람됨을 드러낸다. 두 자녀와 부인을 병으로 잃고 상실감에 빠진 베르디는 "나의 모든 작품과 바꿔서라도 가족을 되돌리고 싶다"고 했다. 가족애가 가늠되는 회고이다. 이후 '나부코'로 재기한 베르디는 예술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말년에는 선한 영향력를 남긴 예술가로 자리매김한다.


그 영향력의 결청체는 1899년에 완성한 '안식의 집'이다. 안식의 집은 가난한 음악가를 위해 베르디가 전 재산을 들여서 지은 집이다. 사후 저작권 수익까지 안식의 집 운영에 맡겼다. 26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80세에 희극 '팔스타프'를 작곡한 베르디는 평생 예술에 정진하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최고 작품을 '안식의 집'이라고 했다는 후일담이다. 베르디의 동상에 새겨진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 흘렸고 사랑했다"는 문구가 무척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날 밀라노에는 비가 내렸다. 베르디의 묘당으로 난 길에 내리던 궂은 비소리가 오페라의 잔향처럼 들렸다. 아마도 베르디가 남긴 울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식의 집에서 나던 인기척이 한 예술가가 타인에게 한 역할을 고스란히 비춘다. 베르디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음악이나 명성보다 가치 있는 나눔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베풀면 기쁨은 배가 된다. 나눔은 행복을 몇 배로 꽃피운다. 그날 본 '안식의 집'이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먼 나라의 이 풍경이 꿈꾸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영옥<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