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사각의 링을 뜨겁게 달궜던 박찬희씨가 지난 6일 경북 구미 신라불교초전기념관 앞에서 복싱 포즈를 취하고 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주먹에는 여전히 챔피언의 포스가 느껴졌다.
전설의 복서를 만났다. WBC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벨트를 다섯 차례 지켜낸 사나이. 코리아가 어떤 나라인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70년대, 주먹 하나로 국민에게 희망을 준 영웅. 바로 박찬희(69)다. 과거 그의 시합이 있던 밤이면 통행금지에 걸린 시민까지 '박찬희 경기 날'이라며 풀려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고향이 대구라는 사실을 대구시민도 잘 모른다.
언론에 잘 나서지 않는 그를 지난 6일 대구에서 구미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짧게 인터뷰했다. 앉아 있었지만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했다. 그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박찬희는 40여년 전 세계를 흔든 순간들과 고향 대구에 대한 마음, 그리고 은퇴 당시에는 언론에 밝힐 수 없었던 속마음까지 털어놨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예전처럼 링 위에 서지는 않지만, 여전히 현장이 편하다. 지금은 후배가 운영하는 건설회사를 도우면서 공사 관련 문의가 오면 사람들을 연결하고 조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신기한 게 몸은 아직도 선수 같다. 새벽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지금은 체육관 대신 현장으로 향할 뿐이지 '움직여야 산다'는 몸의 기억은 그대로다."
▶대구사람도 박 선수의 고향이 대구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중구 삼덕초를 다니다 2학년 때 서울로 올라갔지만 대구의 기억은 또렷하다. 미군부대도 기억나고,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방천시장도 생생하다. 고향이라는 게 묘해서 오래 떠나 있어도 마음 한쪽에 늘 남더라. 그래서 5차 방어전만큼은 꼭 대구에서 하고 싶었다. 협회에 부탁해 경기를 대구경북실내체육관에서 열었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 친구들도 찾아와 응원해 주었다. 이후 삼덕초에 나무 한 그루를 기증했다. 뿌리를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
▶권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체육관을 지나가는데, 두 선수가 링 안에서 맨주먹으로 맞붙고 있었다. 도망갈 곳 없는 사각 링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니 '저건 진짜 남자다운 운동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반대할 게 뻔해 몰래 체육관에 등록해 다녔다. 한영고 1학년 때 처음 나간 '서울시 신인대회'에서 6연승으로 우승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고백했다. 우승 트로피를 본 부모님이 '그래, 한번 제대로 해봐라'고 운동을 허락해 주셨다."
▶국가대표 발탁도 굉장히 빨랐다.
"운동도 독하게 했고, 운도 따랐던 것 같다. 권투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이던 1974년, 고교 2학년 신분으로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김치복 선수였는데 5대 0으로 이겼다. 그 승리로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고, 그해 9월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플라이급에 출전해 금메달까지 땄다. 국제무대도 처음이고, 많은 관중 앞에서 치르는 큰 경기 역시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 겁이 안 났다. 오히려 '전 국민이 라디오로 듣고 있을 텐데 실망시키지 말자'는 마음이 들었다. 금메달을 따고 돌아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이어진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됐고,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때 육 여사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우리 아들이랑 동갑이네. 수고했어요'라고 했는데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라이트 플라이급 8강 패배는 지금도 많은 분이 안타까워한다.
"그 시절 약소국이 판정에서 이기기는 정말 어려웠다. 우승 후보인 쿠바의 호르헤 에르난데스 선수와의 경기에서 심판 다섯 명 중 두 명은 내가 이겼다고, 두 명은 졌다고 했다. 마지막 남은 심판이 무승부를 줬는데, 당시 아마추어는 무승부가 없었다. 결국 상대 손이 올라갔다. 그때 마음속으로 '아마추어는 여기까지구나'라고 결심했다."
▶1977년 프로로 전향해 1979년 세계챔피언이 됐다. 당시 대학생 아니었던가.
"동아대 4학년이었다. 상대는 68전을 치르며 '링의 대학교수'로 불리는 미겔 칸토(멕시코)였고 나는 프로 신인이었다. 모두가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링에만 오르면 이상하게 무서움이 사라진다. 그날도 그랬다. 15라운드 내내 필요한 순간에만 포인트를 챙기자는 전략을 썼고, 결국 심판 전원일치 3대 0 판정으로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대학생 세계챔피언은 내가 처음이었고 기네스에도 등재됐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가장 극적인 경기로는 3차 방어전인 '에스파다스전'을 꼽는 분들이 많다.
"에스파다스 역시 칸토와 같은 멕시코 출신으로 KO율 80%의 강타자였다. 이번도에 전문가들은 '질 것'으로 예상했다. 역시나 1라운드에서 1분도 안돼 다운됐다. 그때 정신이 아찔했다. 원래는 15라운드까지 끌고 가 판정승을 노리는 작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바꿨다. 무조건 5라운드 안에 끝내자고 했다. 이후 1라운드에 두 번 다운시키고, 2라운드에서 어퍼컷으로 마무리했다. 그날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통행금지 단속에 걸린 시민들을 경찰이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얘기가 신문에 실렸다. 지금으로 치면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 경기 이후 급격히 체력이 무너졌다고 들었다.
"방어전을 너무 자주 했다. 1년에 여섯 번. 체중 감량과 스파링이 반복되면 몸이 버틸 수 없다. 스파링을 스무 번, 서른 번씩 하는데 한 번만 잘못 맞아도 머리가 울릴 때가 많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이 바로 일본의 오쿠마 쇼지와 6차 방어전 날이었다. 링에 오르기 전 트레이너에게 '수건 좀 던져 달라'고 했다. 기권패를 각오하려던 거였다. 사실 KO패보다는 기권패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링에 오르니 또 본능적으로 피하고 때리고…. 결국 9라운드까지 버텼지만 배에 들어온 강한 한 방을 맞고 주저앉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은퇴를 결심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
"의외로 홀가분했다. 사실은 조금 신나기도 했다. 챔피언이라는 게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었다. 체중 관리, 스파링, 훈련…. 24시간이 운동으로 꽉 차 있었다. 은퇴하니 그냥 자유가 좋았다. 마음껏 먹고, 잠도 자고. 그런데 석 달쯤 지나니 또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몸은 이미 한계였고, 스스로 인정할 때가 됐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정말 열심히 했고, 한 경기 한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요즘 한국 복싱의 침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인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예전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체육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줄어서 그렇다. 선수층이 얇아지니 스타가 나오기 어렵고, 스타가 없으니 관심도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다시 터질 거라 믿는다. 복싱은 결국 같은 조건에서 붙는 운동이다. 너도 주먹 두 개, 나도 주먹 두 개, 다 똑같다.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없다. 피하고 때리고, 또 피하고 또 때리는 건 결국 노력의 결과다. '하면 된다' '버티면 된다' 이 두 가지만 잊지 않는다면 다시 좋은 선수들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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