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공부 망상'은 삶의 모든 단계를 유예시키는 프리 패스인 '공부'라는 성공 방정식이 더는 사회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한편에는 능력주의의 실패에 분노하는 엘리트들, 다른 한편에는 능력주의에 따라 희망이 없다며 절망하는 청년들. 그리고 점점 더 유치해지고 비겁해지면서 자기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초'엘리트 관료 집단들. 교육에 대한 피해 서사만 난무하는 가운데 공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서문 '비겁해지지 않는 공부를 위해' 중에서)
대학에서 직접 청년을 만나며 공부와 교육의 문제를 체감한 사회학자 엄기호, 고통받는 현대인의 심리를 가장 가까이서 관찰한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이 '공부 중독'(2015)에 이어 10년 만에 새로운 대담집 '공부 망상'을 펴냈다. 두 저자는 10년 전 대담에서 삶의 모든 단계를 유예시키는 프리 패스인 '공부'라는 성공 방정식이 더는 사회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 구성원이 공부에 중독돼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끝없는 시험에 들어갔던 2015년, 적어도 우리는 한국 사회의 공부 방식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한국은 공부에 중독돼 있다. 이에 더불어 사회 곳곳에 퍼진 정서는 피해의식과 분노다. 공부만 잘하면 무엇이든 쟁취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약속이 허물어진 지는 오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나마 '공정한' 이 방식에 매달리며 각자의 피해 서사를 쓰고 있다.
이 피해의식이 '공부하면 다 가질 수 있다'는 여전한 만능감과 충돌하는 지금, 이 책은 한국 사회의 공부가 만든 유능한 무능력자, 청년 세대의 극단주의와 극우화, 정치와 교육에 대한 논의를 폭넓게 아우르며 '공부의 기쁨'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를 묻는다. 2부 1장 '유능한 무능력자의 탄생'에서는 단일한 정답 찾기, 극단적인 효율성의 추구, 고도화 같은 한국 사회의 공부 방식이 유능한 무능력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기술만을 고도로 익히는 공부가 사회를 무능하게 만들고 있는 현상을 짚는다.
공부 망상/엄기호·하지현 지음/녹스/176쪽/1만8천원
2부 2장 '사회의 부족화'에서는 의료계, 법조계 같은 전문직뿐 아니라 예술계, 대기업도 점점 부족화되어가며 세습을 통한 부족주의가 완성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스스로 진보적이라 생각하지만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보수적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한 이들의 모순을 가정과 사회에서의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3부 '믿음을 되찾기 위해'에서는 '레벨 업'으로 변질된 성장을 짚는다. 두 저자는 다섯 차례의 대담을 거치며 한국의 교육이 단 한 번도 진정한 성장을 목표로 삼은 적이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오늘의 공부는 한편으로는 다른 재능이나 역량에 비해 과대평가되어 유치하고 비겁한 인간형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육 자체가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교육이 '무능한 유능력자'를 양산할 뿐 아니라, 교육 자체가 '무능한 유능력'으로 낙인찍혀 있는 것.
우리는 공부를 둘러싼 이 암울한 담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교실과 진료실에서 매일 청년들을 마주하는 두 저자에게 무엇보다 절박한 물음이다. "자존감은 원인이 아니라 과정이에요. 처음부터 자존감 높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성취들이 쌓이면서 만들어집니다. 그 자존감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요. 무언가 해내고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어요. 지금 학교에서 받는 성적 내지는 평가 점수가 나를 구성하고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164쪽)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