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역 인근 군부대 집중돼 물품 풍부
단속 뜨면 흩어져 '도깨비시장'이라 불려
당대 유명 문인·음악가로 북적이던 향촌동
다방,음악감상실서 교류하며 창작 이어가
해방 직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역에는 연일 수백 명의 피란민이 당도했다. 대구역과 인접한 중구 일대는 자연스레 피란민들이 하나둘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시절 지어진 극장 '영락관' 뒤편 부지에 판자촌이 형성됐다.
1957년 대구 중구 중심가에서 교통수신호하는 경찰관. 한국저작권위원회
향촌문화관 상설 전시실에 전시된 1950~6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동시장 풍경. 향촌문화관
오늘날의 교동시장 모습. 6·25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PX 물품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공간은 현재 중구 도심 재래시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남일보 DB
◆피란민들의 삶의 터전 '교동시장'
대구 중구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주로 교동시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품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대구역 인근엔 미군 수송·보급창고와 PX(매점)가 소재했고, 육군본부를 비롯한 주요 국군부대도 대구에 집적돼 있었다. 그래서 '암시장'에선 이른바 '별난 외제 물건'이 풍부하게 유통됐다고 한다. 교동시장은 PX 물품 판매 단속이 시작되면 상인들이 도깨비처럼 자취를 감췄다고 해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렸다.
당시 교동시장은 대부분 이북 출신 상인이 활동했다. 주민들 말을 종합해보면, 이북 상인들은 친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상황에 따라 태도도 거칠게 변모해 대구사람과는 확연히 달랐다고 한다. 처음 시장을 찾은 대구시민들이 그 기세에 눌려 마지못해 물건을 사는 일도 있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1960년대 초, 교동시장에서 양화점을 운영했던 강경낙(여·84)씨는 "그땐 이북 사람들이 '대구 사람은 장사할 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자기들 눈엔 돈이 굴러다니는 게 훤히 보이는데, 대구 사람들은 들어앉아만 있다는 거였다"고 했다.
강씨는 "이북 사람들은 단속이 뜨면 재빨리 도망가야 하니 군복 같은 걸 몸에 주렁주렁 감아 길거리에서 팔았다"며 "가게 세도 안 내고 그렇게 돈을 악착같이 끌어모아 서울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을 두고 혈혈단신으로 내려왔으니 치열함이 남달랐던 것 같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1951년 대구 향촌동 모나미 다방에서 열린 이효상의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 영남일보DB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서 미군들이 동료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 영남일보DB
◆문인과 음악가들의 마음의 안식처 '향촌동'
교동시장이 피란민 생계의 터전이었다면, 향촌동은 전쟁통에도 낭만을 잃지 않은 공간이다. 구상, 조지훈, 이중섭 등 당대 한국을 대표한 문인·예술인들이 향촌동 일대에 머물며 글과 그림, 음악으로 하루를 견뎠다. 이들은 다방과 음악감상실에 주로 모였다. '모나미 다방' '꽃자리 다방' '아담 다방' '상록수 다방' 등에서 출판기념회와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특히, 모나미 다방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시인이 두 차례 출판기념회를 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록 다방은 1955년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유명 음악가도 적잖았다. 김동진, 변훈, 권길상, 하대응, 권태호, 이경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와 '녹향'을 즐겨 찾았다. 르네상스는 1·4후퇴 당시 대구로 내려온 박용찬이 자신이 소장하던 음반으로 공간을 꾸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곳을 찾은 외신기자들은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고 감탄했다.
녹향은 1946년 문을 연 클래식 음악 동호인들의 공간이다. 창업주인 이창수의 향촌동 자택 지하에서 시작해, 해방 이후 코리아백화점 3층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도 향촌문화관 지하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향촌동이 피란 예술가들의 거점으로 자리 잡은 덴 공간적 여건만큼이나 '사람' 역할도 컸다. 대구대 양진호 교수(문화예술학부)는 "당시 '대구에 가면 구상 시인이 있다'는 말에 예술가들이 향촌동으로 앞다퉈 몰려 들었다"고 했다. 구상 시인은 향촌동 '화월여관'에 묵으며 예술인들과 교류했다.
양 교수는 "향촌동 골목은 식민지 시기부터 상업시설과 여관, 다방이 밀집해 있어 외지에서 온 이들이 머물기 좋은 환경이었다"며 "이런 공간적 여건 위에 구상 시인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더해지면서 향촌동이 피란 예술가들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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