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발발후 대구에도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피란민들이 몰려왔다. 전쟁이 난지 20여일 뒤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대구로 옮겨온 영향이 컸다. 이 피란민촌이 오늘날 인구 230만명 대도시가 된 대구 발전의 모태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당시 대구인구는 40여만명이었지만 피란민들 유입으로 70만명까지 불어났다.
이에 영남일보는 2025년 12월 초부터 2026년 1월 초까지 한 달간 대구 피란민촌의 흔적을 찾아 취재했고, 그 내용을 시리즈로 연재했다. 이 과정에서 북구 복현1동 , 서구 평리1동 열차촌,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동구 신암동 6·25촌(625번지)에 피란민촌의 흔적을 확인했다. 마지막(5편)으로, 당시 피란민촌이 가장 활발하게 형성됐던 부산지역 상황도 살펴봤다. 대구 피란민촌 형성 과정과 비교하고, 아울러 전후 75년에 즈음한 오늘날 대도시의 '보존'과 '개발'의 가치도 함께 되새기며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952년 부산 보수동 보수천변에 조성된 피란민 가옥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한 도시를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6·25전쟁 시기 피란민들은 정부가 머무는 곳을 '안전함'의 신호로 인식했다. 6·25전쟁 발발 후 그해 7월16일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로 수도를 옮겼다. 정부는 같은 해 8월18일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1945년 28만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951년 84만명으로 폭증했다. 전쟁 직후 한 달여간 대한민국의 중심이던 대구가 인구 급증으로 식수난·식량난·주택난을 겪었던 것처럼, 부산도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 산 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아미동 비석마을
1953년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주거지 전경.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일본인 묘지를 그대로 활용해 집의 축대로 사용한 건물로, 당시 형태가 비교적 잘 유지돼 있다. 시는 보존을 위해 현재 보호막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정부는 부산에 몰린 피란민을 수용소 시설에 머물게 하며 혼란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부산시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47만여 명에 불과했던 부산 인구는 피란민 유입으로 1951년 84만여 명, 1952년 85만여 명까지 급증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에는 귀향하는 피란민이 늘며 82만여명으로 다소 감소했지만, 당시 부산의 인구 수용 능력이 30만 명 수준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도시가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인구 변화.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공미희 HK연구교수의 논문 '한국전쟁기 피란민의 부산 정착과정과 정부정책 고찰'에 수록된 자료. <그래프=생성형 AI>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산시는 피란민들을 몇 세대로 한데 묶어 군용 대형 천막을 지급한 뒤 도심 외곽으로 보냈다. 당시 공무원이 준 '아미동 산19번지'라고 적힌 종이쪽지 한 장과 천막을 들고 피란민들이 향했던 곳은 아미동. 이곳은 원주민조차 거들떠 보지 않던 일본인 공동묘지터였다.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곳곳에서는 일본인 비석을 건축자재로 활용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왼쪽은 비석을 계단으로 활용한 사례이고, 오른쪽은 담벼락에 박혀있는 비석의 모습. 조윤화기자
아미동 비석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엔 우리와 다른 일본의 무덤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땅을 파 시신을 매장한 뒤 봉분을 올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화장한 유골을 땅에 묻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뒤 주변을 제단처럼 쌓았다. 살 곳이 막막했던 피란민들에게 일본인 공동묘지는 이미 기초가 갖춰진 집터나 진배 없었다.
현재도 아미동 비석마을엔 비석이 가스통의 받침돌로 쓰이거나 대문 앞 댓돌 등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단, 담벼락 곳곳에도 한자가 적힌 비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산시는 전쟁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2022년 이 마을을 '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아미동 비석마을이 자리한 부산 서구 일대 주거지 전경. 조윤화기자
이 마을에서 만난 안숙자(여·84) 할머니는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열 살 무렵, 경북 경주에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피란했다. 안 할머니는 "부산에 와서 처음엔 5개월가량 천막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일본인 묘지 터에 천막과 주변에서 구한 재료들을 모아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어릴 적 큰 태풍이 한 번 왔는데, 지붕이 들썩거리다 결국 '휙' 날아가 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먹고 사는 일도 빠듯했다고 한다. 안 할머니는 "식수를 구하려면 한 시간 넘게 내리막길을 내려가 반나절간 우물가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겨우 한 양동이 물을 얻은 뒤 다시 한 시간을 꼬박 걸어 오르막길로 향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주로 인근 국수공장에서 국수를 걸고 남은 찌꺼기들을 싼 값에 사 온뒤 물에 풀어 죽을 만들어 먹었다. 지금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느 부자 못지않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부산학연구센터가 발간한 '6·25 피란생활사–피란민의 삶과 기억'에도 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단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황해도 연백 출신 이용환(1943년생)씨는 "1953~1954년쯤 일본인 묘지 위에 미군들이 버리고 간 상자를 주워다 집을 짓고 살았다"며 "1962년이 돼서야 공중 화장실이 생겼는데, 그 전까지는 거적을 쳐서 만든 움막 화장실을 이용했다. 제대로 된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비만 오면 오물이 넘쳐 화장실을 쓰는 것조차 큰 곤욕이었다"고 말했다.
◆ '168'계단 오르내리며 일터로 향한 피란민
1945년 부산 동구 초량동 168계단 일대 항공사진. 경사가 매우 심한곳이어서 밭고랑 폭이 매우 좁게 조성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3일 찾은 부산 동구 초량동 168계단. 경사가 30도를 넘는 탓에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계단 끝이 보일 정도다. 조윤화기자
대구의 피란민촌이 비교적 완만한 구릉이나 강변을 따라 형성됐다면, 산이 많고 평지가 좁은 부산의 피란민촌은 가파른 비탈을 끌어안 듯 들어섰다. 부산항과 가까운 동구 초량동 역시 그런 지형적 조건 속에서 피란민촌이 형성된 곳 중 하나다. 원래 이 일대는 가파른 지형에 밭들이 계단처럼 자리했던 곳이다. 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이 이 비탈진 밭자락 위에 판자집을 하나둘씩 지으면서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168계단'이다. 이름 그대로 168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높이에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경사가 30도를 넘는 탓에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계단 끝이 보였다.
부산시는 2025년 3월 168계단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주민과 관광객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본 168계단 일대 주거지 모습. 조윤화기자
이처럼 가파른 곳에 사람들이 몰려 살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초량동은 부산항과 가까워 부두 일용노무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엔 최적의 위치였다. 당시만 해도 이 일대 아래로는 2층 건물조차 드물었다. 집에서 오륙도 방향 바다를 바라보면 배가 들어오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수품이나 잡화를 실은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이 보이면, 피란민들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부두에 닿는 시간에 맞춰 일을 나설 수 있었다.
168계단은 단순한 오르막길이 아니라, 피란민들의 하루를 결정짓던 생활 동선이자, 생존의 길이었던 셈이다. 현재는 부산시가 계단 옆 노후 주택 일부를 매입해 모노레일을 설치하면서 주민과 관광객 모두가 비교적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 숨 가쁜 노동의 동선이었던 이 계단은 이제, 전쟁기 부산 피란민들의 삶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전문가의 제언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6·25전쟁 시기 전황과 정부 수도 이동 속에서 생겨난 '피란민촌'이 도시 형성 과정의 출발점으로 본다. 피란민촌이 전쟁과 이주의 역사가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동체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 "지형 특성 따라 다른 피란민촌의 흔적"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본인 제공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전쟁이 나자 서울·경기·강원 등지에서 온 피란민들이 대구와 부산으로 몰렸다"며 "특히 대구는 1950년 7월16일부터 33일간 임시수도로 기능하면서 비교적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피란민들이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김 소장은 "이후 낙동강 방어선이 북한군에 돌파될 위기에 놓이면서 대구도 위협받자, 정부는 그해 8월18일 부산 천도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이동했지만, 북쪽에서 내려와 돌아갈 곳이 없었던 일부 피란민들은 대구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고 했다. 이어 "부산은 1·4후퇴 이후 유엔군 수송선을 통해 대규모 피란민들이 추가 유입되면서 '최종 정착지' 성격이 더 뚜렷해졌다"고 덧붙였다.
김 소장은 도시의 지형 특성에 따라 피란민촌 흔적이 서로 달랐다고 해석했다. 그는 "지형 특성상 산이 많아, 고지대에 형성된 부산의 피란민촌 상당수는 도시 정비로 감당하기 어려워 오랜 기간 방치됐었다"며 "그 결과, 도시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란민촌 흔적이 옅어진 대구에 비해, 부산에는 전쟁기 삶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 "피란민촌 도시재생 움직임 주목"
이재용 계명대 교수(도시계획학과). 본인 제공
계명대 이재용 교수(도시계획학과)는 "대구 피란민촌을 도시 형성의 출발점 중 하나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피란민들은 하천 옆, 산자락, 기차역 주변에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렇게 형성된 피란민촌은 도로와 주거지가 뒤엉킨 채로 확장됐고, 이후 행정이 뒤늦게 개입해 개발이 이뤄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모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피란민촌이 예전엔 낙후된 주거지나 철거 대상으로 인식됐는데, 최근엔 이 역사를 알리고 보존하려는 지자체들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북구 복현1동 피란민촌, 서구 평리동의 기억공간(옛 열차촌), 동구 신암동 6·25촌,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평화기념마을 등 피란민촌 도시재생사업은 전쟁과 가난을 견뎌낸 이들의 삶을 도시의 역사로 인정하는 과정"이라며 "이 같은 기억의 축적은 도시의 정체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공동체 연속성을 회복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했다.
다만, 모든 피란민촌을 동일 방식으로 보존 또는 개발하려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는 "중요한 건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주민 삶을 기준으로 어떤 개입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것"이라며 "경우에 따라선 일단 공공행정기관이 최소한의 주거 안전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론 주민과 함께 (개발여부) 방향을 정하는 단계적 접근이 적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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