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몰려 수용소 한계에 다다르자
천막 하나 들고 日공동묘지터 자리 잡아
부두 일용직 노무자들 산복도로에 집 짓고
배 들어오면 168계단 오르내리며 생계
1952년 부산 보수동 보수천변에 조성된 피란민 가옥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한 도시를 향해 움직인다. 6·25전쟁 시기 피란민들은 정부가 머무는 곳을 '안전함'의 신호로 인식했다. 6·25전쟁 발발 후 그해 7월16일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로 수도를 옮겼다. 정부는 같은 해 8월18일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한다. 1945년 28만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951년 84만명으로 폭증했다. 전쟁 직후 한 달여간 대한민국의 중심이던 대구가 인구 급증으로 식수난·식량난·주택난을 겪었던 것처럼, 부산도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아미동 비석마을
1953년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주거지 전경.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아미동 비석마을이 자리한 부산 서구 일대 주거지 전경. 조윤화 기자
일본인 묘지를 그대로 활용해 집의 축대로 사용한 건물로, 당시 형태가 비교적 잘 유지돼 있다. 시는 보존을 위해 현재 보호막을 설치해 관리하고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곳곳에서는 일본인 비석을 건축자재로 활용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왼쪽은 비석을 계단으로 활용한 사례이고, 오른쪽은 담벼락에 박혀있는 비석의 모습. 조윤화 기자
정부는 부산에 몰린 피란민을 수용소 시설에 머물게 하며 혼란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부산시는 피란민들을 몇 세대로 한데 묶어 군용 대형 천막을 지급한 뒤 도심 외곽으로 보냈다. 공무원이 준 '아미동 산19번지'라고 적힌 종이쪽지 한장과 천막을 들고 피란민들이 향했던 곳은 아미동. 이곳은 원주민조차 거들떠 보지 않던 일본인 공동묘지터였다.
아미동 비석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엔 우리와 다른 일본의 무덤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땅을 파 시신을 매장한 뒤 봉분을 올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화장한 유골을 땅에 묻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뒤 주변을 제단처럼 쌓았다. 살 곳이 막막했던 피란민들에게 일본인 공동묘지는 이미 기초가 갖춰진 집터나 다름없었다.
현재도 아미동 비석마을엔 비석이 가스통의 받침돌로 쓰이거나 대문 앞 댓돌 등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단, 담벼락 곳곳에도 한자가 적힌 비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산시는 전쟁기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2022년 이 마을을 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안숙자(여·84) 할머니는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열 살 무렵, 경북 경주에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피란했다. 안 할머니는 "부산에 와서 처음엔 5개월가량 천막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일본인 묘지 터에 천막과 주변에서 구한 재료들을 모아 움막 같은 집을 지어 살았다. 어릴 적 큰 태풍이 한 번 왔는데, 지붕이 들썩거리다 결국 '휙' 날아가 버렸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먹고사는 일도 빠듯했다. 안 할머니는 "식수를 구하려면 한 시간 넘게 내리막길을 내려가 반나절 동안 우물가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겨우 한양동이 물을 얻은 뒤 다시 한 시간을 꼬박 걸어 오르막을 올라와야 했다"고 했다. 이어 "주로 인근 국수공장에서 국수를 걸고 남은 찌꺼기들을 싼값에 사 와 물에 풀어 죽을 만들어 먹곤 했다. 지금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느 부자 못지않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 '168'계단 오르내리며 일터로 향한 피란민
1945년 부산 동구 초량동 168계단 일대 항공사진. 경사가 매우 심한곳이어서 밭고랑 폭이 매우 좁게 조성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3일 찾은 부산 동구 초량동 168계단. 경사가 30도를 넘는 탓에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계단 끝이 보일 정도다. 조윤화 기자
부산시는 2025년 3월 168계단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주민과 관광객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본 168계단 일대 주거지 모습. 조윤화 기자
대구의 피란민촌이 기차역이나 강변 인근에 형성됐다면, 부산의 피란민촌은 산이 많고 평지가 좁은 지형적 특성 탓에 경사가 가파른 산복도로에 자리한 경우가 많았다. 부산항과 가까운 동구 초량동 피란민촌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몰려온 피란민들이 비탈진 밭자락 위에 판자집을 지으면서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168계단'이다. 이름 그대로 168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이 길은 까마득한 높이에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경사가 30도를 넘는 탓에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계단 끝이 보인다.
이런 가파른 곳에 피란민촌이 형성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부산항과 가까운 초량동이 부두 일용노무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엔 최적이어서다. 산복도로에 터를 잡은 피란민들은 오륙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군수품이나 잡화를 실은 배가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뒤 서둘러 부두로 내려가 일을 했다.
산복도로에서의 피란민 삶은 일상생활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생업과 맞닿은 선택이기도 했다. 현재는 부산시가 168계단 옆 노후 주택 일부를 매입해 지난해 3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서 주민과 관광객 모두가 비교적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 숨 가쁜 노동의 동선이었던 이 계단은 현재 전쟁기 부산 피란민들의 삶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조윤화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