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21년 7월 7일 정부서울청사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와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을 위한 기본원칙 및 활용 기본방향'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사는 곳이 계급인 나라',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차는 단순히 공간적 계급화뿐 아니라 '민주주의 꽃'인 투표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울 수도권에 국회의원 의석이 집중되면서 입법에 따른 행정력이 미치는 수혜에 있어서도 지방은 늘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수도권에 몰린 국회의원들은 수도권을 위한 입법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지방은 점점 더 고립돼 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 대표성 외면한 헌재
지난 2014년 10월 30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 지역선거구 획정 기준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선거구별 인구편차가 최대 3대 1까지 허용됐던 기존 기준을 2대 1 이하로 강화하라는 내용이었다.
헌재의 판단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1인1표 평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이지만 지역 대표성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당시 반대 의견을 낸 재판관 3명은 "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상황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면 도시를 대표하는 의원 수만 증가할 뿐, 지역 대표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농어촌의 의원 수는 감소할 것이 자명하다"고 경고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경고는 현실이 됐다. 22대 총선(2024년) 기준으로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은 전국 지역구 254석 중 122석, 48%를 가져갔다. 서울 홀로 전체의 19%에 해당하는 48석을 가져간 것이다.
국회의원이 입법·예산 심의·국정감사·정책 결정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결정권과 의제 설정권이 서울 등 수도권에 집중된 셈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수도권에서 전체 지역구 의원의 절반을 선출하게 되면 정치 영향력은 지방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고 우려했다.
◆ 의성·청송·영덕·울진의 기형적 선거구
헌재의 논리가 만든 기형적 결과물은 경북지역의 '의성·청송·영덕·울진' 선거구가 대표적이다. 4개 군이 하나의 선거구로 묶이면서 면적은 서울시의 약 6배(3천500㎢ 이상)에 달하게 됐다. 반면 인구는 15만 명 남짓(2024년 기준 약 14만 9천732명)으로, 서울 강남 한 개 선거구(인구 25만 명 이상)와 똑같이 단 1석만 배정받는다.
주민들은 투표하려면 수십 ㎞를 이동해야 하고, 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차를 타고 다니느라 지역 곳곳의 현안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의원 한 명이 서울 의원과 동일한 표결권을 가지고 4개 군, 수십 개의 읍·면, 수백 개의 마을 현안을 처리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대표성은 두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모든 국민의 표가 같은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인구 대표성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지역의 이해와 이익이 의회에 고르게 반영돼야 한다는 지역 대표성이다. 문제는 헌재가 인구 대표성에 방점을 두면서 수도권 의원들이 법률 제·개정, 예산 심의, 국정감사를 주도하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 지역 대표성 부재의 실제 피해 사례
이 때문에 지역의 이해는 국가 정책으로 반영되기 힘들어지는 구조를 낳게 된다. 대표적 예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교통 인프라 격차다. 지난 2024년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GTX-A가 개통되며 수도권 주민의 출퇴근 시간을 80분에서 20분대로 줄였다. GTX-B, GTX-C도 추진 중이다. 총투자 규모는 134조 원에 달한다. 반면 영남권 광역급행철도(MTX)와 충청권 광역급행철도(CTX)는 논의만 있을 뿐 착공 일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건희 기증관'(가칭)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2021년 4월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유족이 문화재와 미술품 2만3천181점을 국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 시설 건립을 지시하자 전국 40여 개 지자체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결정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기증이 결정된 이후 기증관에 대한 구상, 추진계획, 관계부처 협의, 부지 결정 과정이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 없이 진행된 것은 물론, 공청회·설명회도 단 한 차례 열리지 않은 채 서울 송현동과 용산이 후보지로 결정됐다. 기증 이후 약 70일 만이다.
국민의힘 김승수(대구 북구을) 의원은 문체부의 입지 선정 관련 회의록을 공개하면서 "회의 당시 이미 문체부 공무원을 중심으로 이건희 미술관의 지역 공모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행했다"며 "회의록에는 지역 요구를 감안해 공모할 경우 과열 경쟁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은 "전문가 7인으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가 사실상 공론화 과정을 대체하고 있다"며 "위원들이 정부 산하 기관장이나 공무원 출신, 수도권 인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 무의사결정의 구조화
이처럼 지방의 절박한 요구가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현상은 행정학에서 말하는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론으로 설명된다. 바흐라흐와 바라츠(Bachrach & Baratz)는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잠재적 의제들이 아예 정책 결정 과정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봉쇄하는 것을 무의사결정으로 정의했다. 수도권 의석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현재의 국회 구조에서는 지방의 핵심 의제들이 논의 테이블에 오르기도 전에 사장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무의사결정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법적·제도적 프레임을 동원해 변화를 시도하는 의제 자체를 '불온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2004년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위헌 결정이 대표적이다.
당시 헌재는 성문헌법 어디에도 없는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수도 이전에 제동을 걸었다. 기득권을 쥔 수도권 중심 체제가 자신들의 위상을 뒤흔들 수 있는 '수도 이전'이라는 근본적 의제를 사법적 잣대로 봉쇄한 전형적인 사례다.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라는 절충안이 나왔지만, 입법·사법·행정의 핵심 기능이 여전히 서울에 잔류하게 되면서 '정치·경제 권력의 서울 집중'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기회는 요원해졌다.
지난 대선 당시 개헌을 통해 행정수도를 헌법에 명문화하기로 했던 이재명 정권 역시 말을 바꿨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6·3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를 제안하면서도 '행정수도 명문화'는 개헌 논의 의제에서 배제했다. 논쟁적 사안인 데다 시일이 촉박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양원제 도입을 제안한다.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원내대표 시절인 지난 2025년 2월 기자회견에서 "지방 소멸 시대에 수도권 주장만 반영되고 비수도권은 소외된다"며 "상하원 양원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우 인하대 명예교수도 "입법권의 분권으로 지역 대표형 상원제를 포함한 양원제 도입이 중요하다"며 "양원제는 다수당의 폭정 방지, 입법 품질 제고 및 지역 대표성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경모(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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