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장 발언대] “초군청은 행사가 아니라 순흥의 역사입니다”…박기화 이장이 지키는 마을의 결

  • 권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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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11 18:54  |  수정 2026-04-12 14:06  |  발행일 2026-04-11
박기화 이장이 순흥 초군청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의복을 갖추고 있다. <권기웅기자>

박기화 이장이 순흥 초군청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의복을 갖추고 있다. <권기웅기자>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1리에서 만난 박기화 이장은 자신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고향 사람입니다." 그 한마디에 삶의 이력이 모두 들어 있었다. 어릴 적 이 마을에서 자라 타지로 나가 오래 직장생활을 했고, 다시 순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떠나 있을 때보다 돌아왔을 때 더 크게 다가왔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저 살던 동네였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마을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읍내1리 이장을 맡고 있다. 이번에는 순흥 초군청 좌상까지 맡았다. 영광이라는 말보다 책임감이 먼저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처음 이장을 맡으라고 했을 땐 솔직히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도 주민들이 믿고 권해주셨으니 외면할 수 없었지요."


박 이장은 이장 일을 두고 '행정 보조'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농촌에서 이장은 서류를 챙기는 사람인 동시에, 마을의 크고 작은 숨결을 먼저 듣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불편을 살피고, 이웃끼리 엉킨 마음을 풀고, 마을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는 "농촌은 결국 사람이 공동체를 지탱한다"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장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은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 주민들과 함께 준비한 초군청 행사였다. 어르신부터 젊은 사람들까지 각자 바쁜 삶을 잠시 접고 한데 모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을 공동체의 힘을 다시 봤다고 했다. 특히 이번에 좌상을 맡으면서 초군청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행사 하나 치르는 차원이 아니라, 순흥의 역사와 정신을 오늘로 이어오는 일이라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는 것이다.


순흥초군청은 구한말 순흥 지역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자치 기구이자 향토 방위 조직이다. 지역의 질서를 지키고, 풍흉을 점치고, 공동체 화합을 도모하던 독특한 민속 전통이다. 농민 조직인 초군의 대표인 좌수는 관과 맞먹는 권위를 지녔고, 향촌의 치안과 땔감 조달, 공동체 결속을 맡았다. 지금은 선비촌 일대에서 열리는 민속행사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박 이장은 "초군청은 단순히 옛 풍습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순흥이라는 고장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최근 순흥을 둘러싼 문화적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면서 조선 왕실과 역사 인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순흥과 깊은 인연이 있는 금성대군 이야기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 이장은 이를 "순흥 입장에선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했다. 금성대군은 역사책 속 인물에 그치지 않고, 이 지역의 역사와 정신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영화나 문화 콘텐츠를 통해 지역의 인물과 이야기가 다시 조명되는 건 반가운 일"이라며 "초군청 같은 전통 행사도 바로 그런 역사와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박 이장의 말끝에는 늘 '주민들과 함께'라는 표현이 따라붙었다.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은 없고, 마을은 결국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전통을 잘 지키면서 더 많은 분들이 순흥을 찾아 역사와 문화를 직접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순흥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순흥에는 오래된 시간이 쌓여 있다. 관아의 흔적이 있고, 국경의 요충지였던 기억이 남아 있으며, 선비의 결도 배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스스로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전통을 몸으로 맡아 오늘까지 끌고 와야 한다. 박기화 이장에게 초군청 좌상은 바로 그런 자리였다. 마을을 돌보는 일과 역사를 잇는 일이, 그의 삶에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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