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이란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사업 환경을 뒤바꾸는 충격적인 기술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1월에는 피지컬 AI시대를 연 월드 시뮬레이션 모델 '코스모스'의 공개가 있었다. 2월에는 에이전틱 AI의 실체를 보여준 '클로드 코워크'와 '오픈클로'가 확산되었다. 3월에는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AI 메모리 최적화 기술 '터보퀀트'가 나왔다.
기본 계획, 실행 계획, 실행, 평가라는 1년 단위의 사이클은 어느새 흘러간 옛 시절의 관행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헐떡거리며 겨우겨우 변화를 따라간다. 우리는 모두 늙은이고 패배자이며 시대의 낙오자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순교자이고 거인이며 영웅이기도 하다. 변화를 따라가면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작가 허먼 멜빌은 1853년 '필경사 바틀비'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필경사(筆耕士)란 글씨를 반듯반듯하게 잘 써서 행정 서류를 만드는 필기 노동자이다. 소설은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던 필경사가 문득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일을 안 해서 변호사가 애를 먹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1980년대 후반까지 필경사, 혹은 대서사(代書士)라 불린 사람들은 관청의 꽃으로 위세가 당당했다. 산자부 장관을 역임한 어떤 분은 사무관 시절 자신이 받아야 할 상장의 글씨를 필경사가 안 써줘서 며칠 동안 쩔쩔맨 경험을 술회하셨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글씨가 제대로 안 나온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사설학원에서 '펜글씨 습자'를 가르치던 시절이었다. 군대에도 차트병이라는 유사한 보직이 있었다.
1990년대 정보화시대가 되고 워드 프로세서가 보급되자 세상은 달라졌다. 잘 쓴 글씨에 대한 사회적 수요, 정성과 마음을 담은 손글씨의 영광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날아갔다. 그 많던 필경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인사혁신처에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직접 붓글씨로 작성하는 상징적인 보직 정도가 남아 있다.
지능화 시대가 찾아온 2026년. 많은 일자리가 필경사 같은 운명을 맞고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정에 묶어놓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술은 직업의 과정을 대체하지, 목적을 대체하지 않는다. 손글씨라는 기술은 직업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대체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서를 권위 있게 기록한다'는 직업의 목적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은 업(業)의 본질에 집중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건희 회장이 말한 업의 본질은 사업의 근본적인 목적,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핵심 가치이다.
호텔 사업은 현상적으로 서비스업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호텔은 입점 위치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에 그 업의 본질은 '부동산업'이 된다. 반도체 사업은 현상적으로 제조업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반도체는 기술의 세대 교체가 극도로 빠르기 때문에 그 업의 본질은 새 세대 제품을 경쟁자보다 먼저 양산하는 '시간산업'이 된다.
나는 경북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지방연구원은 지역 개발 과제와 정책 대안을 연구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지식서비스업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자체와 운명을 같이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우리 업의 본질은 공공의 자금에서 지방 소멸 대응의 계기를 찾아내는 '국가 예산 추적업'이 된다.
대한민국의 예산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고 국회에서 예산안으로 확정된 뒤 각 부처 출자출연기관에서 사업화되어 나라장터에서 발주된다. 공공데이터포털, 범부처통합연구지원시스템, 국가과학기술정보서비스 같은 수많은 플랫폼은 국무회의, 국회, 나라장터라는 3대 본류의 곁가지들이다. 지방연구원이 해야 할 진짜 일은 여기서 머니 센싱(Money Sensing), 즉 지방 소멸에 대응할 돈 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리고 돈 냄새를 추적하는 사냥개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최근 경북연구원은 'GDI AX 서비스 포털'이라는 머니 센싱 AI를 구축하고 있다. 글로벌 오픈소스 LLM을 다운받아서 자체 GPU로 로컬에서 학습했다. 이토록 훌륭한 LLM을 누구나 공짜로 얻어서 자기만의 AI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충격적인 변화이다.
머니 센싱 AI는 먼저 모든 국무회의 동영상을 분석한다. 대통령과 장관들의 발언과 부처별 사업 및 정책 브리핑 자료를 연계시켜 지식 그래프를 만들고 개념들의 관계망을 분석한다. 이를 경북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서 요약보고서 PDF 파일을 만든다. 이것이 1차 보고서이다.
1차 보고서를 참조 자료로 하여 AI는 국회의 '의안 정보' 사이트에 있는 '2026년도 예산안'의 711개 첨부 파일들을 열어서 읽는다. 경북 관련 사업을 출연금 사업, 융자금 사업, 보조금 사업으로 분류하고 사안별, 주제별, 부처별 연관성을 분석해서 2차 보고서를 생성한다.
2차 보고서를 참조 자료로 하여 AI는 예산을 사업으로 발주하는 공모 일정을 분석한 뒤 나라장터 사이트의 선행 발주 내용들을 분석하여 6개월 후에 발주될 국비 사업의 공모 내용을 예측하는 3차 보고서를 생성한다.
마지막으로 AI는 예상되는 가상의 제안요청서(RFP)를 생성하고 사업에 적합한 경북 기업의 포트폴리오를 찾아 입력하여 가상의 제안서를 4차 보고서로 생성하고 이 제안서에 대한 가상의 평가까지 진행한다.
AI는 기존의 많은 일자리를 대체했다. 당연히 경북연구원도 필경사처럼 사라질 수 있다. 우리는 경북이라는 의뢰인을 위해 국가 예산을 추적한다는 업의 본질을 지킬 때만 살아남는다. 대구경북행정통합이 이루어지면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와 똑같은 수준의 인텔리전스로 예산을 운영해야 한다. AI 전환에서 소외되는 소상공인들에게 수많은 지원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오직 업의 본질만이 우리 자신과 의뢰인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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