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기술보증기금 고객부장
중동의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섬뜩하다. 인공지능(AI)이 표적 식별과 공격 의사결정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기술의 진보가 언제든 '파괴의 효율'로 돌변할 수 있음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기술혁신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로 변질될 때 기술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된다. 이제 세계는 기술의 속도보다 방향을 묻기 시작했다. 더 빠른 AI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착한 AI' 생태계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이 흐름의 중심에 설 기회를 선제적으로 포착했다. 정부는 지난 3월 제네바에서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식량계획(WFP) 등 6개 주요 유엔 기구와 글로벌 AI 허브 구축을 위한 협력의향서를 체결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성과를 넘어선다. 한국이 AI 기술의 종속적 소비국을 넘어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국제 규범과 공공 협력의 거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상징적 사건이다. AI 기술 확산을 둘러싼 국제적 담론에서 한국이 변두리가 아닌 중심으로 이동할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 허브에 담아야 할 철학은 분명하다. 한국은 이제 '더 센 AI'를 맹목적으로 좇는 나라가 아니라 '더 바른 AI'를 설계하고 표준을 제시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특히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국가와 구호 현장에서 AI가 발휘할 공공적 가치는 막대하다. AI는 사각지대의 환자를 더 빨리 찾아내고, 신종 감염병 위험을 초기에 경고하며, 재난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배분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전쟁의 AI가 파괴의 정밀도를 높인다면, 착한 AI는 인류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기술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착한 AI'를 선도할 독보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 인력과 데이터 시스템, 전국을 잇는 촘촘한 디지털 인프라, 강력한 제조 역량, 그리고 빠른 행정 집행력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임성을 중시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토대까지 갖췄다. 의료플랫폼을 완성하고 실전 제조 기술을 갖추고 기술 도입 과정에서 공공성과 윤리를 치열하게 논의할 수 있는 나라는 흔치 않다. 바로 이것이 국제사회가 '한국형 AI 허브'에 주목하는 진정한 이유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선택과 집중이다. 글로벌 AI 허브를 외교적 수사로 남겨두어선 안 된다. 의료 취약국 원격 진단, 감염병 조기 경보, 재난 지역 보건 대응 최적화 같은 분야에서 국제기구와 함께 글로벌 표준을 만들고 실증해야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착한 AI는 도덕적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 오용에 대한 대중의 불안을 견고한 신뢰로 바꾸는 나라가 결국 미래의 거대 시장을 선점하게 된다. 신뢰받는 기술은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넓게 확산되며, 결국 더 많은 자본과 인재를 끌어당긴다. AI 시대의 진정한 강국은 가장 빠른 나라가 아니라 인류가 나아갈 가장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나라다.
대한민국이 유엔 기구와의 협력을 발판 삼아 의료와 구호, 생명과 공존의 영역에서 착한 AI 생태계를 선도한다면, 우리는 기술 강국을 넘어 '기술의 품격'을 갖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사람을 살리고 내일의 일자리를 지키는 기술, 그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선택해야 할 담대한 생존 전략이다. 총보다 청진기, 속도보다 신뢰, 경쟁보다 공존. 그 길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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