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마을이 된 천년고찰 쌍계사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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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18 11:41  |  수정 2026-04-18 12:41  |  발행일 2026-04-18
6·25때 소실된 초대형 천년고찰 ‘김천 쌍계사’
마을이 된 절터…대웅전 부분 복원 ‘희망’
1934년에 촬영한 쌍계사 대웅전 전경. <독자 제공>

1934년에 촬영한 쌍계사 대웅전 전경. <독자 제공>

천 년을 이어온 경북 김천의 대찰 쌍계사(雙溪寺)는 불과 70여 년 전 화재로 그 모습을 잃었지만, 아득한 옛날 얘기처럼 상상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다. 6·25전쟁 때(1951년) 수도산에 진을 친 파르티잔의 방화로 소실된 쌍계사의 파편을 찾아 나선 날, 가야산맥 수도 지맥 높은 산들에 애워싸인 김천의 오지 증산면에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라 말기인 850년(헌안왕 3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쌍계사는 규모 면에서 증산면 소재지인 유성리 옥동마을 전체가 경내였을 정도의 대가람이었다. 지금의 증산면 행정복지센터가 대웅전 앞마당이었고, 여기에서 200m가량 떨어진 증산우체국 자리에 일주문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경찰관서, 초등학교, 농협 등 공공기관과 주택(42가구)의 부지도 과거 쌍계사 말사였던 청암사 소유이며, 각 기관과 주민들은 매년 임차료를 물고 있다. 임차료는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쌍계사의 전설은 주로 '큰절'이었다는데 모아진다.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권섭(1671~1759) 선생은 유람기에서 "쌍계사엔 열 개의 방이 있었고, 당(堂·한옥 몸채방과 방 사이의 큰 마루)이 네 개, 요사채가 여섯 채다. 자하문 등 네 곳에 문이 있고, 대웅전 등 전각도 네 개였다"고 했다. 이때는 35년 동안의 중창을 마무리(1647년)한 모습으로, 이영구 김천시 경제정책과 팀장은 "대웅전만 하더라도 조선 최대급인 정면 5간, 측면 3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로 2.5m, 세로 1.5m 크기의 대웅전 주춧돌(10개)만 보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증산면 주민복지센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소나무 세 그루. 이 소나무들은 수백 년간 쌍계사를 지켜봤다. <박광제 시진작가 제공>

증산면 주민복지센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소나무 세 그루. 이 소나무들은 수백 년간 쌍계사를 지켜봤다. <박광제 시진작가 제공>

이밖에 수많은 스님이 수행하며 17~18세기 조선불교 화엄학의 가풍과 선과교의 맥을 이었으며, 매일 1천여 명에 이르는 스님과 신도들의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사찰 앞 대가천을 뿌옇게 물들이며 성주까지 흘러갔다는 등 쌍계사가 초대형 사찰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쌍계사 마당에서 뛰어놀며 자란 옥동마을 주민 김종권(90)씨는 "지금의 마을 끝나는 지점이 쌍계사 입구였다. 거의 매일 절에 가서 뛰어놀았다. 쌀 씻는 구유(그릇)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숨바꼭질을 할 때면 구유 속에 숨곤 했다"며 "그때는 절에서 끼니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밥을 줬다. 신도들도 거창, 무주 등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내가 자라면서 크다는 절을 두루 다녀봤지만, 쌍계사처럼 큰 부처님을 모신 곳은 없었다"며"특히 대웅전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이 걸려있던 대형 후불탱화가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쌍계사엔 스님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고도 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당시는 일제강점기 말엽으로, 불교 탄압의 영향으로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쌍계사는 잿더미가 됐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흩어져 명맥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 범종(높이 1.82m)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쌍계사 명부전을 지키든 시왕상과 목조지장보살상은 시내 개운사에 봉안돼 있다. 괘불지주석과 맷돌 등 석물 일부는 청암사에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 대웅전 자리엔 주춧돌만 남아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쌍계사 대웅전 자리엔 주춧돌만 남아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양양 낙산사와 철원 심원사 등 전란으로 소실된 대형 사찰들이 복원된 것과는 달리, 쌍계사는 전면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미 절터에 민가와 공공기관이 들어서면서 온전한 마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대웅전 터에 남은 거대한 주춧돌과 연화대좌, 증산면 주민복지센터 앞마당의 소나무 3그루(경북도기념물) 정도가 과거를 말해주고 있지만, 김천시가 증산면 행정복지센터 이전 부지를 확보하면서 부분적인 복원의 희망도 싹트고 있다.


송 국장은 "지금부터라도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역사문화공간으로서의 시설을 확충하는 등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증산면 행정복지센터가 옮겨가면, 그 자리에 대웅전을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도선국사는 쌍계사를 세우면서 '승(僧)천년 속(俗)천년'을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이 터엔 스님들이 천 년을 살고, 다음은 속인들이 천 년을 살 것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쌍계사는 창건 1천100년 후 소실됐고, 그 터엔 마을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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