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근남면 수곡리 도로편 옅에 남사고 가록관 전경모습이다.<원형래기자>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왕피천이 잔잔히 흐르는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길 건너편으로 한적한 전통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차를 세우고 5분 남짓 걸음을 옮기면 생가 터와 기록관, 기념 공간이 이어지고, 주변에는 한옥 기와를 얹은 고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천문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1509~1571)의 삶과 사유를 담은 유적지다.
격암 남사고 사상가의 생가 집터 모습.<원형래기자>
겉으로는 조용한 역사 공간이지만, 이곳은 과거의 흔적만을 보존하는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수십억 원의 행정적 투자가 이루어지고, 학술적 재해석이 더해지며,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능성까지 함께 모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문화유산'이다.
■ 49억 원이 만든 공간… 유적지 조성의 실체
남사고 유적지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정비에 들어갔다. 울진군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에는 총 49억 3천800만 원이 투입됐다. 초기에는 전통 건축 복원이 중심이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강당과 서재, 사당을 건립하는 데 약 38억 원이 사용되며 유적지의 기본 틀이 형성됐다.
이후 2011년에는 전시 패널과 안내 시설이 설치됐고, 2013년부터 2014년 사이에는 기념관과 생가가 새롭게 조성됐다. 2016년에는 내부 전시 공사가 추가되며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전시형 유적지'가 완성됐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보존 → 전시 → 관광화'로 이어지는 단계적 개발 과정을 보여준다.
■ 매년 5천만 원… 유적지는 지금도 유지된다
울진 근남면 수곡리에서 남사고 주차장 공원앞에서 들어가는 입구에 선 고택.<원형래기자>
유적지 조성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연간 관리비는 약 5천500만 원 수준이다. 그중 약 77%는 인건비로, 시설 운영이 사람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기요금, 소규모 보수비, 경비 시스템 유지비 등도 꾸준히 발생한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 유지 수준을 넘어 경관 개선에도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2023년에는 파고라 보수에 약 1천190만 원이, 2025년에는 연못과 조경 정비에 약 1억 2천만 원이 사용됐다.
이는 유적지를 단순히 '보존하는 공간'이 아니라, 방문 환경을 개선하는 관광 공간으로 발전시키려는 흐름으로 읽힌다.
■ '예언가'가 아닌 사상가… 학술적 재조명
남사고 기록관 안에 혼천의 철재 모형물이 전시돼 있다.<원형래기자>
남사고는 대중적으로 미래를 예측한 '예언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록관 전시와 학계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그는 관상감에서 천문을 담당하며 하늘의 움직임과 자연의 변화를 관찰했고, 이를 인간 사회와 연결해 해석하려 했던 인물이다.
기록관 관리자는 "남사고는 단순한 예언가가 아니라 천문과 지리, 유학을 아우른 통합적 사상가"라며 "방문객들이 그의 깊이를 함께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그의 사고 방식을 '데이터 기반 사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그 패턴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했다는 점에서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분석적 사고에 가까운 접근이다.
■ '십승지'… 난세를 읽는 현실적 지혜
남사고 사상의 핵심은 '십승지' 개념에 있다. 이는 전란을 피해 살기 좋은 이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 속에서 실제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지혜였다.
남사고 기록관 내부에 격암 남사고 초상화 모습.<원형래기자>
그는 지형과 물길, 기후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인간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의 입지 분석이나 환경 연구와도 맞닿아 있는 사고 방식이다.
■ 다른 지역과 비교… '조용한 유적지'의 한계
남사고의 '십승지' 개념은 전국 여러 지자체에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주와 문경, 상주 등은 이를 기반으로 체험 프로그램과 관광 코스를 운영하며 방문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와 비교하면 울진 남사고 유적지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사색형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체험 프로그램이나 콘텐츠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울진문화원 서영도 이사는 "현재는 '보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며 "스토리텔링과 체험 요소를 결합해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분석한다.
■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현장을 찾은 관광객 김민지(28·대구) 씨는 "예언가로만 알고 왔는데, 실제로는 깊이 있는 학자라는 점이 인상적이고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이라며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라 좋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관광온 관광객 모녀가 입구 표지판 설명을 보고 있다.<원형래기자>
지역 주민 최영신(78·근남) 씨는 "어릴 때는 전설처럼 들었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역사로 다가온다"며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윤은경 문화관광과장은 "남사고 유적지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우리 전통사상과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교육의 장"이며 "앞으로 지속적인 관리와 콘텐츠 개발을 통해 울진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육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남겨진 과제… '활용의 문제'
데이터를 통해 드러나는 핵심은 분명하다.
울진 남사고 유적지는 보존과 조성에는 성공했지만, 활용과 콘텐츠 측면에서는 발전이 필요한 단계다.
즉, 문제는 '얼마를 투자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
■ 예언을 넘어, 시대를 읽다
남사고는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미래를 맞히는 데 있지 않았다. 자연을 관찰하고, 변화를 읽으며, 그 흐름 속에서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 했던 데 있었다.
울진의 조용한 유적지에서, 그는 지금도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의 시대를 제대로 읽고 있는가?"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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