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달리고, AI로 세상을 읽다…한계 넘는 시각장애인들

  •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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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20 09:07  |  수정 2026-04-20 09:25  |  발행일 2026-04-20
“처음엔 두려웠지만 계속 달리다 보니 이젠 일상
시각장애인에 하체 힘은 필수, 근력이 부상 막아줘”
“AI 활용 이후 정보 검색 시간 100분의 1로 단축
새로운 기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삶의 영역 확장”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공포 그 자체다. 더욱이 '시각장애인'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정도는 더 심화될 것이다. 시각이 제한된 상태에서 촉각과 청각에만 의존하며 일상생활을 하기엔 '눈' 밖의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다. 앞을 보고 한 걸음을 내딛기도, 지식과 정보를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힘든 고난의 연속이다. 이처럼 수많은 난관이 시각장애인들을 짓누르지만, 오히려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스며들기를 자청하며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스스로 장애를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보이지 않는 편견에 맞서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길을 선택한 셈이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신체적 한계와 제약을 뛰어넘는 도전 정신을 발휘하며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대구지역 시각장애인 2명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이들은 인공지능(AI)과 마라톤 삼매경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 속에서 '의미있는 삶'의 가치를 하나하나 재발견하고 있다.



지난 17일 오전 대구 달서구 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 컴퓨터 교육실에서 시각장애인 황인철씨가 챗GPT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윤화 기자

지난 17일 오전 대구 달서구 대구시각장애인복지관 컴퓨터 교육실에서 시각장애인 황인철씨가 챗GPT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윤화 기자

◆"시간을 벌어주는 AI" 11년 차 시각장애인 컴퓨터 교사


"시각장애인에게 AI는 정보의 장벽을 허물고 삶의 범위를 넓혀주는 열쇠입니다."


지난 17일 달서구 용산동에 있는 대구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영남일보 취재진과 만난 시각장애인 황인철(47)씨. 그는 이곳에서 11년째 시각장애인들에게 컴퓨터 활용법을 가르치는 강사다. 시각장애인이 또 다른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구조였다. 황씨는 최근 챗GPT, 제미나이 등 AI 사용법을 강의하며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중이다.


황씨는 "13세 때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 시력을 잃었다. 당시 부산에서 거주한 탓에 부산맹학교(중·고교 통합 학교)에 입학한 뒤 이곳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며 "대구로 오게 된 건 1999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면서다. 2004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구시 시각장애인복지관 컴퓨터 강사 채용 공고를 접했다. 학창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컴퓨터 활용 능력을 살려 지원했고, 지금까지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그는 취재진에게 AI가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 방식을 어떻게 바꿨는지 직접 시연해 보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일이었다. 화면 정보를 음성으로 출력해 주는 '스크린리더' 기능을 사용하기에 평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이 꺼져 있어서다.


그가 포털사이트 창을 열고 복지관 인근의 맛집을 검색하자, 조용했던 교육실에 기계적인 음성들이 마구 쏟아졌다. 스크린리더는 '네이버 플레이스 이미지'라는 안내를 10여 차례 넘게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블로그 제목 읽기에 들어갔다. 비시각장애인은 단 몇 초 만에 훑어낼 수 있는 검색 결과지만, 황씨는 불필요한 정보를 묵묵히 견뎌낸 뒤에야 원하는 정보를 골라낼 수 있었다.


황씨가 챗GPT를 실행해 같은 질문을 던지자, 스마트폰에선 곧바로 명쾌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국물이 당기면 OO칼국수, 든든한 한 끼를 원한다면 인근 OO국밥집이 좋습니다'와 같이 핵심만 간추린 정보였다. 황씨는 "비시각장애인은 화면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음성 기능에 의존해 첫 줄부터 차례로 들어야 한다. 특히 맛집처럼 사진이 많은 경우에는 유효한 정보를 찾기까지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이후부터 정보 검색에 소요되는 시간이 체감상 100배 이상 줄어 들었다"고 했다.


AI는 시각장애인들에게 타인 도움 없이는 알기 어려웠던 세밀한 정보까지 알려준다. 그만큼 선택의 폭을 한층 넓혀준 것이다. 기술의 효용이 배움의 현장에서도 빛을 발휘한 셈이다. 황씨는 "옷을 사러 갔을 때 주변 사람에게 물으면 색상이나 핏(fit) 정도의 간단한 설명만 들을 수 있지만, 사진을 찍어 AI에 물어보면 디자인의 디테일과 질감까지 상세하게 묘사해 준다"고 했다. 이어 "아내도 시각장애인인데, 현재 사이버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AI를 학습 보조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며 "교육 자료를 AI에 입력한 뒤 음성으로 질의응답을 주고 받으며, 나름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동료 시각장애인들에게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당부하고 있다. 그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에만 머무는 분들이 많아서 너무 안타깝다. 결국 밖으로 나와 직접 배우고 경험해야 삶이 바뀐다. 복지관에서 무료로 컴퓨터·AI 활용법을 배울 수 있으니 한 번쯤 용기를 내보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부산 연제구 대저생태공원 일대에서 열린 제45회전국장애인체육대회 육상부문에 출전한  시각장애인 임승호씨가 트랙위에서  가이드러너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임승호씨 제공

지난해 10월 부산 연제구 대저생태공원 일대에서 열린 제45회전국장애인체육대회 육상부문에 출전한 시각장애인 임승호씨가 트랙위에서 가이드러너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임승호씨 제공

◆"두려움 딛고 트랙 위로" 14년 차 시각장애 마라토너


"어둠 속을 달리는 일이 처음엔 너무 무서웠지만, 연습을 하다 보니 이젠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대구 북구 검단동 한 카페에서 만난 대구시장애인체육회 소속(시각장애 육상) 임승호(62)씨는 자신이 선택한 길인 마라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임씨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눈에 이상이 생긴 건 2009년 45세가 된 무렵. 당시 야맹증 증상이 심해지고 낮에도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판정받은 병명은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 1년 만에 사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악화됐다. 결국 임씨는 2011년(장애인 등록)부터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됐다.


예상치 못한 불행 앞에 임씨는 한동안 무너졌다. 그는 "평소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썼지만, 시력을 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장애인 등록을 마친 후 20년 넘게 몸담았던 자동차 부품공장을 떠나며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했다. 우울증이 심해 2년간은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랬던 임씨가 다시 힘을 냈다.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를 보며 더는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친 건 과거 직장 동료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직장을 관두기 전 동료가 자신에게 '시각장애인들이 안마 기술을 배우는 복지관이 있다'고 한 것. 그는 "제2의 삶을 위해 찾아간 대구시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 교육과 흰지팡이를 이용한 보행법을 하나씩 익혔다"며 "이후 복지관 연계를 통해 광명학교(남구 대명동)에 편입했다. 안마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직업재활 과정을 2년간 이수했다"고 했다.


이 와중에 뜻밖의 선물이 임씨에게 찾아왔다. 광명학교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뛰는 그를 눈여겨본 체육 교사가 마라톤을 권유한 것. 처음엔 "앞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밖에서 달리느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방법이 있다"는 교사의 말에 용기를 냈다. 그렇게 대구지역 불자(佛子) 마라톤 모임인 '대한불교마라톤 동호회'의 문을 두드린 그는 코치와 '트러스트 스트링(Trust String)'이라 불리는 끈 하나에 의지해 첫발을 뗐다. 트러스트 스트링은 가이드 러너와 시각장애인이 서로의 손목에 연결하는 끈(50㎝)이다. 가이드 러너가 끈을 당겨 방향을 안내하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주행 방향을 바꾸는 식이다.


북구 산격동에 있는 경북대 운동장 400m 트랙 위에서 시작된 첫 야외 주행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학생들이 공을 차는 소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등 온갖 소음들이 그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냥 뛰라"는 코치의 외침에 무작정 달렸고, 그러자 억눌러왔던 공포감이 조금씩 완화됐다. 임씨는 "처음엔 발 떼기도 무서웠지만, 어느새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 레이스에만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지난 15일 오후 대구 북구의 한 카페에서 시각장애인 임승호 씨가 러닝 시 가이드러너와 손목을 연결해 달리는 트러스트 스트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윤화 기자

지난 15일 오후 대구 북구의 한 카페에서 시각장애인 임승호 씨가 러닝 시 가이드러너와 손목을 연결해 달리는 '트러스트 스트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윤화 기자

그날 이후 러닝은 삶의 일부가 됐다. 대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꾸준히 참가했다. 첫 대회인 2012년 제32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경기도 개최)에서 남자 1천500m 부문 동메달을 땄다. 2015년엔 같은 대회 5천m 부문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각종 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추가했다. 그는 최근 열린 '제19회 영남일보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해 10㎞ 코스를 완주했다. 임씨는 "이제는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먼저 달리기를 권할 만큼 '뛰는 것' 자체에 애정이 깊어졌다"며 "내가 좋은 것도 있지만, 시각장애인에게 하체 힘이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권하는 경우도 많다. 작은 돌부리나 단차에도 크게 다칠 수 있는데, 러닝을 하면 하체 근력이 길러져 부상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외출 제약 없게" 안전한 보행 환경, 정보 접근성 전제돼야


대구 지역 시각장애인 현황 및 외부 활동량에 따른 행복도 비교. 보건복지부, 대한장애인체육회 자료 바탕으로 AI 생성

대구 지역 시각장애인 현황 및 외부 활동량에 따른 행복도 비교. 보건복지부, 대한장애인체육회 자료 바탕으로 AI 생성

시각장애인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중요한 전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바로 '외부 활동'이다. 집 밖을 나서는 과정은 고단한 도전이지만, 활동 반경을 넓히는 시도 자체가 삶의 활력으로 환원돼서다.


영남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2024년 기준 국내 전체 시각장애인은 24만6천182명이다. 이 중 대구지역 시각장애인은 1만1천745명으로 4.7%를 차지했다.


이들 시각장애인은 외부 활동을 많이 접할수록 행복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장애인체육회가 발표한 '2025년 장애인 생활체육조사' 결과를 보면, 주당 3회 이상(회당 30분 이상) 외부에서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완전 실행자'의 행복도는 평균 3.39점으로 가장 높았다. 반면 신체 활동이 거의 없는 '비실행자'는 2.99점에 머물러 활동량에 따른 행복도 차이를 보였다.


경일대 엄태영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시각장애인의 외부 활동 필요성에 대해 단순히 신체적 건강을 넘어 사회적 고립을 막는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엄 교수는 "시각장애인의 고립은 건강 악화나 사고, 정신적 위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따른 의료·복지 비용 등 사회적 부담도 커질 수 있다"며 "장애인의 야외 활동은 개인 노력만으로 불가하다. 세대 간 사회 통합을 이루고,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 조성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의 외부 활동 활성화를 위해선 안전한 보행 환경과 접근성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엄 교수는 "장애인 관련 시설 부족과 동반자 부재가 시각장애인 외부 활동의 걸림돌인 만큼, 장애인의 외부 활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프라 구축에 신경써야 한다"며 "시각장애인이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거대한 장벽이 되지 않도록 점자블록 정비와 나드리콜 운행 개선 등 이동 지원을 포함한 지역사회의 세밀한 인프라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장애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은 곧 모든 사람이 편안한 '유니버셜 디자인(보편적 설계)' 도시로 가는 길"이라고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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