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같은 공간, 다른 세계

  •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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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19 14:46  |  수정 2026-05-20 09:04  |  발행일 2026-05-20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우리가 사는 공간의 경계는 어디인가.


택시 뒷좌석에 앉아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 운전석의 기사님은 휴대전화로 방청객이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고, 나는 내 휴대전화로 건축 관련 사이트를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 같은 차 안, 같은 공기를 나누는 물리적 공간에 있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일까.


몸은 하나의 좌표 안에 있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장면 속에 들어가 있었다. 기사님은 스튜디오의 웃음소리와 자막이 흐르는 화면 속에, 나는 도면과 이미지가 펼쳐진 건축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었다. 택시라는 물리적 공간은 오히려 비어 있는 껍질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정신은 각자의 화면 속 가상 공간에 더 깊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오래전 보았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의 육체는 현실에 있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가상 세계에 접속해 살아가는 이야기. 또 다른 영화 '아바타(Avatar)'에서는 육체가 있는 곳과 의식이 작동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그 영화들이 상상했던 세계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건축은 오래전부터 공간을 벽과 바닥, 천장으로 정의해왔다. 공간은 물리적 경계에 의해 구획되고, 그 안에서 인간의 행위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마트폰 이후의 일상에서 우리는 물리적 공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공간에 접속해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일상이 된 지금, 공간의 정의와 그 경계는 급격히 흐려지고 있다. 이제 경계는 눈에 보이는 벽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과 '의식'이 머무는 곳에 새롭게 그어진다.


같은 카페에 앉아 있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고, 같은 집에 있어도 각자의 화면 속에 머문다. 물리적 공간은 공유되지만, 경험되는 공간은 분리된다. 우리는 한 장소에 모여 있으면서도 함께 있지 않다. 공간의 공존과 의식의 분리가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간의 정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좌표와 치수, 재료와 구조로 규정되는 물리적 틀을 넘어, 인간의 인지와 경험까지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공간은 더 이상 '둘러싸인 곳'이 아니라, '의식이 체류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택시 안에서 스쳐간 이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공간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묻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공간의 경계는 이제 벽이 아니라, 화면과 시선, 그리고 마음이 향하는 방향 위에 그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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