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의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발걸음마다 묵직한 역사의 숨결이 툭툭 채인다. 영해면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던 영해부의 중심지로 인근 영덕현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곳이다.
한때 동해안 북부 지역의 경제와 행정 중심지였던 이곳은 이제 전국 1호 '근현대 문화유산 지구'라는 새로운 명패를 달고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다. 담장 하나, 지붕 한켠에 배어 있는 백 년의 시간을 따라 영해읍성과 장터거리를 걸어보았다.
◆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영해읍성
발길을 가장 먼저 이끈 곳은 영해면 소재지를 둥글게 감싸 안고 있는 영해읍성 터다. 조선 전기에 축조된 영해읍성은 둘레가 1㎞를 훌쩍 넘는 규모였지만 지금은 성 터와 일부 석축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서문지와 성벽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이 논의 중이다. 단순히 돌을 쌓는 복원을 넘어 성벽 안쪽으로 촘촘히 들어선 근대 가옥들이 읍성의 역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가 핵심으로 보인다.
영해 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 안내도. 과거엔 시내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영해 장터거리 끝자락에 세워져 주요건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남두백 기자>
읍성 터에서 발길을 옮겨 장터거리로 들어서면 공기의 밀도가 사뭇 달라진다. 영해장터거리는 1919년 3월 18일, 영남 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고 규모가 컸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주축이 되고 지역 유림과 장꾼 등 3천여 명이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주재소를 습격했던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거리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 거리는 단순한 장터가 아니다. 근대 상업 공간과 주거 공간이 독특하게 공존하는 곳으로 2019년 '영덕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딘 건물에서 가업을 잇고 있는 함운학씨는 "이 곳에 살고 있는 지역민들과 함께 과거의 추억까지 공유하는 장터거리로 잘 복원해 영해의 랜드마크가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 구 영해금융조합과 영해양조장·사택
영해 장터거리 끝쪽에 우뚝 선 이 건물은 당시 유행했던 모더니즘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완벽에 가까운 좌우대칭 구조가 시선을 붙든다. 정면에는 위아래로 여닫는 6개의 창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 맨 위쪽의 처마선 아래로는 치아 모양의 정교한 톱니 장식이 둘러져 있어 세련미를 더한다. 90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 건축물은 영해 지역 농업과 경제를 주름잡던 중심지였으며 한때 농협 영업장으로 쓰였을 만큼 튼튼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장터거리에서 가장 세련되고 권위 있는 외형을 지닌 건물로 당시 영해가 인근 지역의 금융과 행정 중심지였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준다. <남두백 기자>
금융조합 건물에서 불과 20m 떨어진 곳에는 영해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달래주던 옛 양조장이 자리한다. 이곳은 전통 한옥의 아늑함과 근대식 붉은 벽돌의 조적조 구조가 기묘하게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지붕 위로 망루처럼 우뚝 솟아오른 구조는 멀리서도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는 과거 막걸리 생산을 위한 온도 조절과 환기, 생산 공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계된 기능적 건축의 정수다.
◆ 박제된 과거가 아닌 살아 있는 유산으로
좁은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구 영해의용소방대 건물은 투박하지만 듬직하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거점으로 공동체 정신이 깃든 상징적 장소다. 붉은 벽돌과 높은 망루의 모습이 화마 속에서 영해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보루였음을 말해준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2층 규모의 건축물로 지붕 위로 솟아 있는 작은 망루는 과거 마을의 화재를 감시하던 눈의 역할을 했다. <남두백 기자>
마을 외곽이 아닌 중심부에 자리 잡은 구 영해버스터미널은 또 다른 시간을 보여준다. 지금은 비록 낡고 한적해졌지만 한때는 인근 영양, 청송, 울진을 잇는 동해안 교통의 요충지였다. 낮은 천장과 바래진 시간표 속에는 고향을 떠나고 돌아오던 수많은 이들의 설렘과 눈물이 고여 있다. 터미널 특유의 개방적인 구조는 향후 전시 공간이나 커뮤니티 센터로 활용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30년 넘게 장터거리에서 떡 방앗간을 지키고 있는 김현준씨는 한숨 섞인 말을 건넨다.
"여기가 예전엔 사람 천지였는데 이제는 조용한 곳이 되어 버렸다" 라며 "오래된 건물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람 사는 흔적 그대로의 모습까지 보존하고 복원하면 좀 더 활기차지 않겠나 싶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보존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건물만 남겨서는 안 되고 삶의 온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터거리 좁은 도로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점포병용주택' 양식의 가옥. 일본식 가옥 구조와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영해 사람들이 실제로 장사를 하고 잠을 자던 삶의 터전이다. <남두백 기자>
영덕군에서 추진 중인 '근현대 문화유산 지구' 사업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수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해읍성의 역사적 위엄과 장터거리의 서민적 삶을 하나로 묶어 소멸해가는 지방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대담한 시도다.
낡은 골목길에 새로이 불어올 활력이 옛 영해부의 당당했던 시간을 어떻게 다시 깨워낼지 전국 1호라는 타이틀만큼이나 영해의 내일이 사뭇 기다려진다.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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