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수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회장. <전준혁기자>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심장, 붉은 쇳물이 끓어오르는 철강 도시. 우리가 아는 경북 포항의 일반적인 수식어다. 게다가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천년 고도 경주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포항의 역사와 문화유산은 시민들의 관심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포항 곳곳에 숨겨진 역사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한반도의 굵직한 발자취를 오롯이 품고 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임을 깨닫게 된다. 21년째 이 숨겨진 가치를 발굴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묵묵히 땀 흘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다. 지역 문화유산의 든든한 수호자이자 해설사인 최명수(70) 회장을 만나 포항이 품은 역사의 향기와 보존의 과제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 21년의 헌신, 빛 잃은 문화유산에 숨결을 불어넣다
올해로 창립 21주년을 맞은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는 현재 95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순수 민간 문화역사 단체다. 해마다 문화역사 해설사 배출 교육을 진행해 올해 21기 수료생을 배출했을 만큼 지역 문화 지식 나눔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최 회장은 "포항이 경주라는 거대한 문화 도시 옆에 있다 보니, 그리고 철강과 산업 도시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문화유산이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잘 알려진 포항의 문화유산을 시민들에게 해설하는 것은 물론, 시의 관리가 미치지 못하는 비지정 문화재들을 모니터링하고 직접 안내판을 세우며 관리하는 활동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의 손길은 포항 곳곳에 닿아 있다. 사비로 비지정 문화재 안내판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훼손된 곳은 없는지 꾸준히 유지·보수하며 잊혀가는 유산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보경사 해설봉사에 나선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회원들.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제공>
◆ 선사 암각화부터 동학의 숨결까지… 포항의 재발견
최 회장은 포항을 "단 한 번도 문화적으로 소외된 적이 없는 도시"라고 단언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면 포항의 장구한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는 "한국형 암각화의 대표격인 칠포리 암각화 등 선사시대 유적이 포항에 널려 있다. 진평왕 때 창건된 보경사, 오어사, 법광사 등 신라 시대 대찰들이 왜 이 변방에 세워졌을까? 당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요충지로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방어하기 위한 묵직한 의미가 담긴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신라 비석인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도 모두 포항에서 나왔다"며 자랑스레 설명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도 포항의 저력은 굳건하다. 포항은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 포은 정몽주의 관향(오천)이자, 공민왕 때 왕사를 지낸 진각국사 배천희가 태어난 곳(흥해)이다. 조선 후기에는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신광면 일대에서 활동하며 동학의 교리를 다졌고, 구룡포에는 근대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포항은 그야말로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이다.
◆ 방치된 유산들…"포항시립박물관 건립이 최선의 대안"
그러나 깊은 역사에 비해 보존과 관리의 현실은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 국보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열악한 보존 상태가 도마 위에 올랐으며, 최 회장은 지방 중소 도시들의 훌륭한 박물관 인프라와 포항의 현실을 비교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했다. 그는 "익산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을 가보면 그 유적만을 위한 1대1 전시관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반면 우리는 국보 1점, 보물 13점을 보유하고도 이를 제대로 알릴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송라면 조사리에 있는 조선 전기 '원각조사 유허비'는 사유지 문제로 비각이 헐린 채 비석만 덩그러니 도로변에 서 있고, 장기면 성남사지의 '남파대사비' 역시 덤불 속에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냉수리 신라비 역시 당장 섣불리 다른 곳으로 옮기기보다는, 현재 추진 중인 '포항시립박물관'이 완공된 후 그곳으로 안전하게 이관해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 "포항 문화에 자부심을… 열린 마음으로 함께해 주길"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는 국가유산청 및 보경사와 협력해 15년째 매주 토요일 보경사 해설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도 7월부터 9월까지 내연산과 보경사 일대에서 포항 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간다. 최 회장은 마지막으로 시민들을 향한 간곡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시민들이 우리 지역에도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다는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다"고 운을 뗀 그는 "시민들이 포항의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줄 때, 우리처럼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도 가장 큰 보람과 존재 이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위해 묵묵히 걸음을 걸어가는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최명수 회장과 이들의 노력이 시민들의 삶 속에 스며들기를 기대해 본다.
전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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