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시 중심에 있는 데키주쿠 2층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소. 다다미 한장에 책상과 잠자리를 해결했다. 방 중심의 기둥에는 치열하게 공부한 흔적인 칼 자국들이 남아있다. <임 원장 제공>
과거시험이 없던 에도 시대, 무사 중심의 신분제 속에서 계층 상승의 유일한 돌파구는 '의사'였다. 그 당시 의학은 동양 사상에 기반을 둔 전통의학이었다. 18세기 난학을 통해서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겐파쿠에 의해 '해체신서'가 번역되고 서양 의학에 대한 지식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난학을 선진 문물로 생각했다. 난학의 창구인 나가사키에는 난학을 가르치는 학원이 많이 생겼다.
오가타 고안은 오카야마현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무사의 길을 포기한 그는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공부한 뒤, 오사카에 병원을 열어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치명적이었던 천연두를 막기 위해 1849년 서양식 우두 종두법인 백신 접종을 도입했다(서양은 1796년 제너가, 조선은 1879년 시작했다). 막부와 대중의 불신을 설득하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 생백신을 사람들 팔에 릴레이로 전송을 하면서 전국에 접종소를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번씩 유행하는 콜레라는 무서웠다. 치료도 없었다. 1852년 영국 런던에서 콜레라가 돌았을 때 존 스노의 상수도 지도로 오염된 물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집단에서 병이 어디서 시작했고, 어떻게 퍼지는지 밝히는 역학의 시발점이었다. 1858년 에도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오염된 상수도가 원인이라는 존 스노의 연구결과를 입수해서 전국의 의사들에게 보급하며 방역과 치료에 앞장섰다.
오가타 고안은 의사로서도 선구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본 교육자로서 더욱 빛났다. 건물 1층은 진료를 하던 병원과 거주하는 집이 있었고 2층은 난학 학원인 데키주쿠를 열었다. 데키주쿠는 네덜란드어 원서를 읽고 해석하며 서양의 의학, 물리학, 화학, 군사학 등 최첨단 지식을 연구하는 교육기관이었다.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간 제자들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삶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가르쳤다. <임 원장 제공>
데키주쿠는 무한 경쟁과 철저한 실력주의 위주로 운영되었다. 신분을 무시하고 문하생을 뽑았고 2층 기숙사 청년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다다미 한 장이고 성적에 따라 위치가 달라졌다. 이곳이 침실이자 책상 하나 놓여있는 공부방이었다. 학원에 네덜란드어 사전은 단 한 권뿐이었기에, 제자들은 밤새 줄을 서서 단어를 베껴 적으면서 공부했다. "베개를 베고 잔 기억이 없다"는 회고처럼, 밤샘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쏟아지거나 번역이 막혀 스트레스가 쌓이면, 청년들은 칼을 뽑아 방 한가운데 굵은 나무 기둥을 내리치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도 데키주쿠 2층 기둥에 남아 있는 많은 칼자국들은, 당시 청년들의 투지와 학문적 열정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여기에서 근대 일본을 선도한 수많은 거목들이 탄생했다. 일본 만엔 권 지폐의 인물이고 게이오대학의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근대 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 마스지로,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만든 사상가 정치가인 하시모토 사나이 등이 있다.
고안의 정신은 후손들을 거쳐 오늘날 오사카 대학 의학부의 모태가 되었다. 매년 6월 오가타 고안의 탄생일에 맞추어 데키주쿠에서는 일본 각 분야의 후손들이 모여 기념식과 세미나를 가진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실력과 열정만으로 인재를 뽑았던 데키주쿠의 전통은, 지금도 오사카 대학의 상징인 자유롭고 평등한 학풍으로 살아 숨 쉬며 일본 노벨상 배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오가타 고안은 1857년 제자들에게 의사의 마음가짐을 담은 소책자 '의계요해(医戒要解)'를 남겼다.
"의사의 천직은 오직 사람을 구하는 데 있다. 자신을 버리고 오직 사람을 구해야 하며, 명예나 이익을 탐해서는 안 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 훨씬 가슴에 와닿는 가르침이다. 일본 의학계는 각종 모임이나 학회에서 '의계요해'를 읽으며 의사로서 환자 중심의 정신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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