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 입암면 연당마을 서석지 안쪽 모습. 문을 들어서니 연잎의 초록과 연꽃의 분홍이 어우러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어 송이는 꽃잎을 피우고 있다. 서석지는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이다.
연잎과 연꽃이 어우러진 연당마을
맑은물 도랑 '읍청거'로 가는 길
400년 은행나무·상스러운 돌 '서석'
이황·류성룡·정경세의 성리학 맥
석문 정영방이 학문 닦은 서석지
선바위가는길 붉은 글씨 '연당동천'
수백 년 세월 건너온 듯한 '선바위'
영양군 입암면 연당마을 서석지, 문을 들어서니 연잎의 초록과 연꽃의 분홍이 어우러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붓끝처럼 뾰족하게 입을 다문 봉오리가 대부분인데, 몇 송이는 벌어지는 중이고 두어 송이는 벌써 처져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연당을 둘러본다. 400년 은행나무를 지나, 맑은 물이 들어오는 도랑 '읍청거(揖淸渠)'로 가는 길에는 연못 바닥에 흰 돌들이 많이 보인다. 이 정원을 조성한 석문 정영방(1577~1650)은 "돌 안은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있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군자가 덕의를 쌓아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과 같다"며 이 돌들을 상서로운 돌 즉 '서석(瑞石)'이라 했고, 이 연당도 서석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일재와 사우단을 지나면 서석지의 주 건물인 경정이다. 툇마루 끝 섬돌에 신발을 벗고 경정에 올랐더니 제비가 푸덕거리며 날아다닌다. 방에 걸린 서석지 안내 그림을 볼 때도 제비가 그림 위 가로대에 앉아있다. 대청으로 나와 보니 들어걸개문 위 서까래 사이에 제비집이 붙어있다. 경정이 늘 개방돼 있고 사람이 기거하지 않으니, 제비가 처마 밑보다 대청 안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나 보다. 그 아래에는 제비 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신문지가 펼쳐져 있고, 종이 양쪽 끝은 나무토막이 누르고 있다. 경정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자연과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 전해진다.
서석지의 주 건물인 경정. 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꽃과 돌과 나무 그리고 흙돌담이 그림 같은 풍경을 선보인다.
경정 마루에서 내려다보니 꽃과 돌과 나무와 흙돌담이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다. 경정 마루 안에는 제비가 깃들어 살며 새끼를 키우고 있다. 사람과 자연이 지극한 방식으로 만나는 현장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 적막함 속에는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주파수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400년 전 석문 정영방이 지은 '경정잡영 32절(敬亭雜詠 三十二絶)'도 이런 자연의 말을 사람의 말로 번역한 것은 아닐는지. 물론 들리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번역한 것이니 옮긴이의 삶과 시대에 대한 고뇌가 배어있겠지만 말이다.
경북 영양 서석지에 있는 은행나무.
석문 정영방은 우복 정경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우복의 스승은 서애 류성룡이고, 서애의 스승은 퇴계 이황이니, 서석지 정자의 이름을 경정이라 지은 것도 이해가 된다. 시를 짓고 산수자연을 즐길 때에도 바른 마음의 상태 즉 '경(敬)'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퇴계의 뜻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16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형수와 누나가 왜적에게 겁탈당하지 않으려고 강에 투신해 죽고, 시신을 찾던 종이 적에게 잡혀 죽은 사건을 직접 겪었다.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정영방은 서석지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를 쓰고 학문을 탐구하고 마음을 닦았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우리 전통정원은 담장 안의 내원과 담장 바깥의 자연경관인 외원 전체를 하나의 정원으로 생각한다. 정영방의 '경정잡영 삼십이절'은 서석지 내원을 노래한 것이고 '임천잡제 16절'은 외원을 노래한 것이다. 서석지 외원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 선바위, 자금병, 부용봉이 있는 남이포 일대 지금의 선바위관광지 주변이다.
연당마을에서 선바위까지 거리는 1㎞ 남짓이다. 그 중간에 연당교가 있는데 그 오른쪽 산 아래에 애기선바위가 있고, 그 옆에 벼랑에 붉은 글씨로 '蓮塘洞天(연당동천)'이라고 씌어있다.
동천이란 산과 물로 둘러싸여 숨겨진 낙원처럼 경관이 뛰어난 곳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선비들이 계곡 바위에 '○○동천'이라 글씨를 새기고 자연을 즐겼다. 2018년 한국전통조경학회지에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영양군에는 14곳의 동천이 있었으며, 그중 기록과 구전은 있었지만 멸실된 곳이 연당동천, 자하동천, 계은동천, 본신동천, 금화동천, 당곡동천, 월호동천 등 7곳이다. 연당동천 글씨는 고증을 거쳐 최근 복원한 것이다.
영양 선바위관광지 옆 데크길에서 본 석문. 왼쪽에 선바위가 보이고 오른쪽에 자금병이 있다. 서석지 외원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 지금의 선바위관광지 주변이다.
연당교를 지나면 도로는 오른쪽에 선바위와 부용봉 절벽이 있고 왼쪽에 자양산의 자금병이 있다. 양쪽 절벽이 끊어지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고 길이 생겼으니, 문짝은 없지만 돌로 된 문과 같은 모습이다. 정영방이 석문(石門)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곳의 절경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자로의 에피소드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석문이라는 곳에서 자고 온 자로(子路)가 문지기와 대화를 하는데, 문지기가 공자를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머무르는 곳의 아름다움과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성인의 위대함이 석문이라는 말에 겹쳐진다.
석문을 지나면 반변천 건너편이 선바위관광지다.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 분재야생화테마파크, 영양고추홍보전시관, 농특산물직판장, 효공원, 어린이물놀이장 등이 들어서 있는 영양군의 관문 관광지다. 서석지와 연당마을을 둘러보고 석문을 나와 선바위관광지로 넘어가면 수백 년 세월을 건너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옛 선비들의 삶이 그저 지난 일, 오늘의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남이장군 전설이 서려있고 전통정원 서석지와 이어져있는 선바위관광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옛 사람들의 생각을 새로운 해석과 변용을 통해 도움과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인증샷'과 '좋아요'만 남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자연을 즐기면서 마음을 수양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것도 풍경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민선9기를 맞은 영양군에서는 선바위관광지 내 효공원 재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효공원은 선바위관광지 주차장에서 육교를 건너가면 있다. 이 일대는 앞으로 선바위 약수와 인근 경관지와 관련된 동양사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아 '약수동천(藥水洞天)'으로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그 안에는 자양정, 부용정이라는 이름의 정자 건립도 검토되고 있다.
영양 선바위관광지 효공원 정자에서 본 풍경. 영양군은 선바위관광지 안의 효공원 재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자양정은 효공원의 건너편 자금병이 있는 자양산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정영방은 '임천잡제 16절'에서 자양산을 '흙이 붉고 물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자양(紫陽)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양이라는 이름이 주희와 관련된 지명임을 상기시키며 그의 뜻을 배우지 않는 세태를 꼬집는다. 물의 북쪽에 있는 땅 이름에 볕 양(陽)이 붙는 것은 한수(한강) 북쪽의 한양(漢陽), 중국의 낙수 북쪽의 낙양(洛陽)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강을 바라보는 곳이 햇볕이 잘 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부용정은 선바위 뒤 부용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여기서 부용(芙蓉)은 아욱과의 목부용 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연꽃을 뜻한다. 연꽃은 예로부터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됐다. 도교에서는 여덟 신선 중 여성 신선인 하선고가 들고 다니는 꽃으로 아름다운 선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불교에서는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깨끗한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고결함의 상징이기도 하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성리학에서도 주돈이가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했듯이 선비의 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양군 관계자는 "아직 구상단계이지만, 앞으로 약수터·약수식당·산책로·정자와 명언·명구·명시 등을 담은 조형물들로 새로 공간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며 "선바위관광지와 연당마을의 여러 명소와 경승지를 둘러보고 '약수동천'의 자양정, 부용정에 앉아 과거와 오늘을 비교하며 되짚어보고, 옛 사람이 남긴 시를 각자 풀이해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영양군청>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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