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시 산북면 대하2리 마을 입구에 설치된 안내 표지석. 표지석에는 마을 약도와 함께 자연부락인 큰막골과 작은막골의 위치가 새겨져 있어 대하2리의 옛 지명과 마을 구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강남진기자>
문경에는 외지인이 처음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독특한 자연부락 이름들이 적지 않다. 돼지벼락, 웃무실, 막골, 절골, 배너미, 숫골, 가랫골 등은 처음 접하면 다소 낯설거나 재미있게 들리지만, 그 속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주민들의 삶과 자연환경, 그리고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도시화와 행정구역 개편, 도로명주소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자연부락 이름은 점차 일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문경 곳곳에서는 지금도 주민들이 옛 지명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고성환 향토사 연구가는 "자연부락 지명은 단순한 마을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생활문화가 담긴 기록"이라고 말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이름 가운데 하나는 가은읍 저음리의 돼지벼락이다. 이름만 들으면 마치 돼지가 벼락을 맞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지역에서는 마을 뒷산 능선이 누워 있는 돼지의 형상을 닮았고 여름철 낙뢰가 잦아 자연스럽게 '돼지벼락'이라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확한 문헌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지금도 주민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자연부락 이름 가운데 하나다.
문경읍 요성리의 웃무실과 아랫무실은 문경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옛 마을 이름이다. '무실'은 마을이나 취락을 뜻하는 옛 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 가운데 높은 곳은 웃무실, 아래쪽은 아랫무실이라 불렀다. 도로명주소가 없던 시절 주민들이 위치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생활 속 지명이다.
산북면 대하리의 막골 역시 이름만으로 마을의 지형을 짐작할 수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는 골짜기 끝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문경에는 안골, 밖골, 윗골, 아랫골처럼 지형과 위치를 그대로 이름으로 삼은 자연부락이 많으며, 대하리에서는 지금도 큰막골과 작은막골이라는 자연부락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동로면 적성리의 절골은 과거 사찰이 있었던 골짜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절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지명은 그대로 이어지며 옛 흔적을 전하고 있다. 봉암사와 김룡사, 대승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이 자리한 문경의 불교문화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이름이다.
호계면 견탄리의 배너미도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자연부락 이름이다.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과거 배나무가 많던 넓은 들판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다. 정확한 유래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지명 속에는 당시 마을의 자연환경과 생활상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산양면 현리의 숫골은 숯을 굽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 문경 산촌에서는 참나무를 이용한 숯 생산이 중요한 생계수단 가운데 하나였으며, 숯가마가 있던 골짜기여서 자연스럽게 숫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업화 이전 문경 산간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지명이다.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마을 입구 표지석. 예부터 가랫골이라 불렸던 자연부락으로, 표지석에는 '내 고향 신상괴'와 충효례(忠孝禮)가 새겨져 있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전하고 있다. <강남진기자>
가은읍 상괴리의 가랫골 역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골짜기 모양이 농기구인 가래를 닮았다는 설과, 주민들이 가래를 이용해 논을 개간하면서 붙여졌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정확한 유래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농경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진 자연부락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문경의 자연부락 이름이 특별한 이유는 대부분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세와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특성상 산과 계곡, 바위, 들판의 모습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됐다. 조상들은 화려하거나 꾸며낸 이름보다 마을의 특징을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선택했고, 그 이름은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관문이었던 문경새재를 오가던 선비와 보부상, 나그네들에게도 자연부락 이름은 중요한 길잡이였다. 자연부락 지명은 행정구역보다 생활권을 구분하는 기준이었으며, 주민들은 이를 통해 길을 찾고 위치를 설명하며 일상을 이어갔다.
고성환 향토사 연구가는 "지명은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기억과 정체성을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도시화와 생활환경 변화로 자연부락 이름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록과 보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로명주소와 행정리 이름이 생활 속에 자리 잡으면서 자연부락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돼지벼락, 웃무실, 막골, 절골, 배너미, 숫골, 가랫골 같은 이름에는 산과 들, 계곡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선조들의 생활방식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화려한 문화재는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온 이러한 지명은 문경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앞으로도 자연부락 이름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경의 지역문화와 향토사를 지켜나가는 소중한 작업이 될 것이다.
강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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