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우리가 흔히 쓰는 '원래 그런 사람'이란 표현에는 회피와 체념, 그리고 무력감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있다. 가령 "저 사람 왜 저래?"라는 질문에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한다면 정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의 문제행동이 처음도 아니지만 그걸 제어하거나 바꿀 힘과 의지가 제겐 없다는 걸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름 전, 이탈리아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삐딱한 SNS 도발에 "그는 '원래 그런 식'이다. 맞대응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멜로니 총리를 조롱하는 영상물을 게시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트럼프는 멜로니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진에 '접근금지 명령 필요'란 문구를 붙여놔 이탈리아와 여성 총리를 성적으로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보다 며칠 전, 트럼프는 방송 인터뷰에서 멜로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내게 사진을 애걸했습니다. 불쌍해서 함께 찍어줬죠." 6월 G7 정상회의 직후 나온 이 발언에 멜로니는 격분했다. 펄쩍 뛰며 "참담하다. 날조된 얘기다. 동맹국에 이따위 행동을 해도 되나?"란 메시지를 냈다. 예정했던 외무장관의 방미 일정도 취소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트럼프는 7월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멜로니뿐 아니라 유럽 각국의 심기를 긁는 불편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핵심 동맹국들을 형편없는 파트너로 몰아붙이고 유럽 주둔 미군을 모두 빼갈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특히 그린란드는 미국의 통제하에 두는 게 옳다며 노골적인 병합 의지를 다시금 드러냈다.
트럼프의 조롱과 협박, 말 폭탄 작전이 통했을까. 앙카라에 모인 나토 정상들은 그 비위를 맞추느라 무진 애를 썼다. 한 외교 전문가는 "콧대 높은 유럽 정상들이 다 쩔쩔매며 트럼프의 '동맹 참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지침에 따라 유럽국들은 국방비를 작년 대비 20% 올렸고 상당액은 미국산 무기를 사는 데 쓰기로 했다.
유럽 정상들은 이 회의에서 월드컵 축구 얘기는 입도 뻥긋 않기로 약속했단 후문도 있다. 레드카드를 받아 미국-벨기에전에 나설 수 없는 발로건 선수를 구하려 트럼프가 FIFA 회장에 전화를 걸어 억지 출전시킨 그 축구 얘기다. 결과는 미국의 1대4 완패. 하지만 세계는 심판 판정도 바꿔치기한 몰상식에 경악했고, 미국이 지자 환호하며 그 결과까지 다시 바꿔보라고 트럼프 약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유럽 정상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새삼스레 트럼프한테 상기시켜 열받게 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그가 화를 내면 무슨 말을 내뱉을지 종잡을 수 없고 자칫 유럽에 예상치 못한 피해로 되돌아올 거란 걱정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황제'의 심기는 깃털만큼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제후들의 속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일까. 트럼프는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이번 나토 회의장에는 사랑과 단합이 넘쳤다. 그들이 '각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하더라. 다 큰 어른들이 한 말인데 듣기 좋지 않나"라며 흡족해했다. 상대가 울며 겨자를 먹든, 혹은 엎드려 절을 받든, 뭐든 제멋대로 한다는 트럼프의 막무가내 악동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이것이 한 달 사이, 세계 선진국이란 나라들 사이에 오간 가십이다. 국제외교에 통용되던 설득과 합의의 문법, 정중한 언사와 상대 존중 정신은 트럼프 시대 들어 멀리 달아났다. 정의 규칙보다 힘을 내세워 상대를 밟고 조롱하며 무릎 꿇리는 그 현장은 고개 들어 군림하는 자와 낮게 머리를 조아리는 자들만 있는 정글이 되었다.
국제외교 현장만 그런 게 아니다. 국내 정치에도 트럼프는 약육강식 정글 논리를 편다. 강자만이 사는 정치다. 그 때문에 지지율은 취임 첫 주만 긍정이 부정을 앞섰고, 현재는 긍정 30 부정 60%대로 고착됐다. '노킹스(No Kings 왕은 안 돼)' '50501(50개 항의 50개 주 1개 운동)' 시위가 거의 매일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위는 살인까지 부른 이민 단속과 관세전쟁, 이란 전쟁이 촉발한 물가 폭등, 민생 경제 추락이 방아쇠가 됐다. 그러나 사실 더 추하고 꺼림칙한 문제는 트럼프와 그 일가가 다함께 나서 대통령직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고 있단 점이다. 트럼프의 정책 모두 돈과 연루됐다는 비판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최근 트럼프의 SNS 관리회사가 남보다 몇 초 빨리 게시물을 보는 수혜자한테 월 10만 달러를 받을 거란 보도가 나왔다. 트럼프는 통상정책, 금리, 전쟁 계획까지 트루스소셜에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이걸 단타 매매 운용사나 헤지펀드에 0.001초라도 빨리 넘겨 돈 벌 기회를 늘려주고 결과적으론 트럼프 수익을 올리겠다는 얘기다.
트럼프의 신탁사는 작년 4월 초 애플 등 360만 달러(약 55억 원) 주식을 샀다. 다음날 오전 트럼프는 "지금은 주식을 살 때"란 글을 올렸고 오후에 관세 유예 조치를 발표했다. 뉴욕 증시는 폭등했다. 미 정부가 '인텔 지분 10% 인수'를 발표하기 전에도 그는 주식 25만 달러어치를 매입했다. 신탁사의 관리자는 트럼프의 장남이다.
6월 말, 미 정부윤리청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25년 한 해에 최소 22억 달러(약 3조4천억 원)를 벌었다고 공시했다. 2024년 번 돈의 3배가 넘는다. 트럼프와 두 아들이 설립한 가상화폐 기업의 토큰 판매 수익이 6억 달러, 코인 라이선스 계약에 따른 로열티 수익은 더 많았다.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로도 2억 달러를 벌었다.
또 ABC, CBS 등 방송사에 소송을 걸어 합의금으로 받은 돈이 8천만 달러가 넘었다. 여기에 트럼프 시계와 화보의 명의 사용권료로도 수백만 달러를 받았다. 부인 멜라니아는 NFT 판매로 600만 달러, 아마존 다큐멘터리 '멜라니아'로 1천70만 달러를 벌었다. 전 가족이 합심해 미국의 대통령직을 비즈니스로 만든 결과물이다.
우리는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마두로를 압송하며 그곳 석유를 가져와 큰돈을 벌게 됐다고 말한 걸 기억한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이 통행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게걸스레 여러 차례 해온 것도 기억한다. 그동안 전쟁에서 그가 힘줘 말한 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에 돈이 들어올 것이란 얘기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그런 뉴스에 우린 인이 박였다. 짜증스럽게 "트럼프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시답잖은 가십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건 회피와 체념, 그리고 무력감의 발현일 뿐이다. 정부나 정치인 외교관은 할 수 없어도 이젠 개개 시민이 그의 비민주적 행태를 지적해 노(No)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트럼프에게 간청해 한국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입 다물라"라고 질책하고 나설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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