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설 사회2팀장
2004년 개봉한 스페인 영화 '머시니스트'엔 1년째 잠을 자지 못한 기계공이 나온다. 뼈만 남은 몰골로 환각 속을 헤매는 이 남자의 극심한 불면은 과거 자신의 범죄에 대한 죄책감과 심리적 압박에서 비롯된 감옥이었다. 그가 잊고 싶었던 자신의 살인 행위 자체가 영혼을 갉아먹으며, 단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하게 했던 것. 그의 수면은 영화 말미에 드디어 성공한다. 경찰서를 찾아 자수하고 유치장에 갇힌 기계공 트레버. "잠을 자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평온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트레버의 가련한 육체를 보면서, 그리고 그의 극심한 불면의 원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문득 현대인들의 불면증이 오버랩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목의 스마트워치에 찍힌 숫자를 확인한다는 한 지인은 "오늘 수면점수가 58점밖에 안 된다"라며 한숨을 내쉰다. 깊은 잠을 몇 시간이나 잤는지 그래프로 점검하는 것이 자신의 아침 루틴이 됐다는데, 어째 득보다 실이 많아 보였다. 수면점수가 80점 이상인 날이 거의 없다는 것. 그는 "수면 점수가 낮으면 괜히 온몸이 찌부둥한 기분이 든다"며 우울해했다. 뿐만 아니다. 침대에 누워 '숙면을 부르는 빗소리'나 '뇌파 안정 힐링음악'을 틀어놓아야 겨우 눈을 감는 수면 풍경도 현대인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의료 현장에 출입한 지 보름 남짓, 진료실과 병원 복도에서 만난 이들의 가장 흔한 호소 중 하나는 뜻밖에도 '잠'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나 수면클리닉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지친 기색이 역력한 환자들로 늘 붐빈다. 수면제 한 알에 겨우 의지해 잠을 청한다는 이부터, 얕은 잠에서 밤새 허우적대는 자체가 두려워 아예 스마트폰 화면만 본다는 이까지 저마다의 불면 스토리도 다양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집계에선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은 환자 수가 연간 100만 명을 넘어섰다.
말 그대로 '잠을 파는 사회'다. 글로벌 슬립테크(Sleep-tech) 시장 규모는 어느덧 40조 원을 바라보고, 국내 수면산업 시장 역시 3조 원대로 불어났다. 이 거대해진 수면시장은 잠들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먹고 자라고 있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생리현상이어야 할 잠이 이제는 돈을 주고 사거나 최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얻어내야 하는 희귀한 상품이 되어버렸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내 몸과 뇌가 고장났기 때문일까. 아니다. 밤늦게까지 온갖 알림을 울려대는 스마트폰, 퇴근 후 가정에서도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업무의 잔상, 상사의 불친절한 한마디에서 촉발된 은연중의 압박감이 우리의 교감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트레버가 자신의 범죄를 외면하려 했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이 그의 영혼을 잠식, 잠에 빠져들지 못한 것처럼. 그래서 그의 불면은 아팠다. 공감이 됐다.
의학적으로 수면은 신체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장 완벽한 자동 회복 시스템이다. 뇌 속 노폐물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면역력을 재정비한다. 의사의 특별한 처방, 비싼 영양제도 숙면이 주는 치유력을 대신할 수 없다.
오늘 밤만큼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치워두면 어떨까. 내 몸을 완벽하게 바닥에 내맡기고 눈을 감는 것이다. 잠 못 드는 그대에게 필요한 건 마음에 살포시 내려놓는 조용한 쉼표 하나가 아닐까.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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