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비울수록 높아진다

  • 박미정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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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7-26 16:22  |  발행일 2026-07-27
박미정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부위원장

박미정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부위원장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며 살아간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애쓴다. 채우는 것이 곧 성장이고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길에서 만난 오래된 가마솥 탑 하나는 그 익숙한 생각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독특한 조형물인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크고 작은 가마솥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하나의 탑을 이루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흔적과 군데군데 번진 녹은 긴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버려졌을 법한 가마솥은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가마솥은 오랫동안 우리 삶을 지켜 온 그릇이다. 장작불 위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한 가족의 하루를 따뜻하게 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솥 앞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고, 둘러앉은 식구들의 웃음이 있었다. 시대가 바뀌며 부엌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탑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가장 위에 놓인 솥보다 가장 아래 놓인 솥이 더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 말 없이 무게를 견디며 모두를 받치고 있었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정도 사회도 든든하게 서 있을 수 있다.


더 깊은 울림은 가마솥의 비어 있는 속에서 왔다. 솥은 비어 있을 때 가장 큰 쓰임을 다한다. 비어 있기에 밥을 담을 수 있고, 사람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조금 덜어낼 때 배려가 들어오고, 고집을 비울 때 이해가 머문다. 자연 역시 같은 이치를 보여 준다. 나무는 묵은 잎을 내려놓아야 새순을 틔우고, 강은 흘려보내기에 늘 맑음을 지킨다.


가마솥마다 남은 녹은 낡음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의 훈장처럼 보였다. 불길을 견디며 수없이 밥을 지어 냈던 기억, 가족의 허기를 달래던 세월이 그 표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이 탑은 쇠붙이를 쌓아 올린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삶의 기록이었다.


산길을 내려오며 문득 내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더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혹시 비워야 할 욕심과 걱정을 품은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의 높이는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보다 무엇을 내려놓았느냐에서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숲속의 작은 가마솥 탑은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우리에게 높이 오르는 법보다 먼저 비우는 법을 조용히 일러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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